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정확히 7월 1일 "스가타 산시로"로 시작된 여정이 7월 29일 "8월의 광시곡"으로 종점에 도착했다.
그의 50년, 30작품 영화인생을 따라 멀고도 가까운 이웃땅 후인은 '7월의 광시곡'에 갇혀지냈다.
당신이 걸어온 영화의 길 위 곳곳에 뿌려놓은
작은 돌부처상(요짐보), 흔들리는 촛불(카게무샤), 쳐다보고싶지 않은 물 웅덩이(주정뱅이 천사),
시무라 다케시의 늙고 병든 우울함, 미후네 토시로의 팔자 수염의 강력함, 나카다이 다쓰야의 광기 근접 조우,
모두 내가 만난 29편의 작품 속에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90년대 중반 비디오시절에는 도저히 불가했던 감독 순례가 최근에는 다행히 조금 숨통이 트여
오즈 야스지로, 장 피에르 멜빌, 루이 말, 마이클 파웰, 할 하틀리, 빌리 와일더, 우디 알렌,
프랭크 카프라, 켄 로치, 카를로스 사우라, 이마무라 쇼헤이, 찰리 채플린, 페데리코 펠리니 등등을 거쳐
구로사와 아키라까지 도착했지만, 그 중 전작주의를 실천한 건 오즈 야스지로와 우디 알렌 정도이다.
애석하게도 이번 구로사와 아키라 역시도 그의 유작인 "마다다요(1993)"을 한글자막이 없어 보지 못했다.
매번 한 작가군의 필모그래피를 거슬러오를 때마다 드리는 말씀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한 작가의 작품군을 단기간 내에 통시적으로 보게되면 적어도 그가 일생동안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주제에 집착하였으며 어떤 영화 문법을 애호했는가를 알 수 있고,
그와 작업했던 일련의 배우와 작가, 스탭진들의 이름이 자막 위로 오를때 무척이나 반갑고 신뢰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그를 만난듯한 착각을 할 수 있는 상상의 권리를 얻은 듯 하다.
이번 구로사와 아키라 작품 순회에서도 그의 대표적인 3명의 페르소나 외에도
국내에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당시 일본 내 중요한 조연으로 활약했을 배우들의 면면들이 낯익고
(한국이라면 허장강, 조춘, 구봉서, 트위스트 김, 송해, 서영춘, 독고성, 등등이 떠올랐을 것이다.)
항시 같이 작업했던 각본가, 음악 감독, 카메라 감독들의 한자 이름들이 하나의 믿음을 던진다.
하지만, 이런 통시적인 시각은 지금 여기 한국에서 하나의 작품이 개봉하였을 때 일으키는 반향,
즉 공시적인 시선을 놓치고 그저 반복과 변화의 흐름만을 쫓는다는 면에서 중요한 해석의 결핍을 낳는다.
가령 구로사와 아키라 초기의 작품들에 대한 당대의 일본 내 평가들은
통시적으로 살피는 나의 앝은 시각과는 또다른 영화문법 해석의 결을 가질 것이다.
일본 영화사를 종단하지 않은 다음에야 차별화된 여성 캐릭터, 신체절단의 기원, 교차되는 카메라기법 활용,
대하 전쟁 서사극의 일반적인 구조와 이탈의 묘미 등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다른 예를 들자면 임상수의 "하녀"와 이창동의 "시", 홍상수의 "하하하"가 동시에 극장에 걸릴 때
당대의 한국 영화들이 반영한 여성상에 대한 공시성 등은 회고전에서 가볍
게 감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순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 등의 작품론을 비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과 같다.
결론에 충실해보자.
지난 아홉 차례의 글 서두에서 반복하듯이 거론했던 구로사와 아키라를 편히 정리해보자.
"스가타 산시로(1943)"에서 "조용한 결투(1949)"의 7년간 9작품을 초기라고 할 때
그는 거의 모든 초기작에서 전쟁 전후 상황 모두에 적절한 호흡으로
국민이라는 모호한 주체를 설정한
휴머니즘으로 일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집중하였는데,
여기에는 일본 고유 무술과 연극인 유도, 가부끼극이 동원되고, 스승과 제자, 의사, 형사, 야쿠자 등이 등장한다.
초기작들 중 대개 추천작으로는 "주정뱅이 천사"의 완결된 캐릭터와 비극의 미장센, 강건한 전진을 꼽지만,
개인적으로는 "들개"와 "멋진 일요일" 두 작품의 처연하고 싱그러운 장르성의 별미도 권해드린다.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전쟁 전후의 이념적 전환과 책임 은폐를 엿보려면
"가장 아름답게"와 "우리 청춘 후회없다"를 연이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고,
유일한 중편이자 처음으로 가부끼적 구성을 자신의 작품 세계로 가져온 "호랑이 꼬리를 밝은 사나이"도 기억할만하다.
"라쇼몽(1950)"의 국제영화제 수상 이후 높아진 일본 내 구로사와 아키라의 위상이 흥행감독으로까지 이어져
"붉은 수염(1965)"으로 초-중기 작품세계의 정리된 흑백 필름에 대한 신뢰, 세 페르소나의 성격 고정과 전면 등장기인
16년간 14작품의 중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황금기이자 일본 영화사 자체의 찬란한 영화가 같이 한 시간이었다.
감독 자신의 작품에서는 선연히 보이지 않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한 일본 경제 특수와 부흥 그리고
안보 투쟁 및 전공투 세대의 이념의 최전선 등도 같은 시간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거의 매년 영화를 발표한 왕성함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감독 자신의 영화적 자신감이 충문한 시기였으며
현대적 고전드라마라 할 "라쇼몽"의 인식과 실제의 일치 불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서구 고전 문학의 영화번안작업이라 할 "백치", "이키루", "거미집의 성", "밑바닥" 등에서
구조될 수 없는 비극과 서민 드라마의 감상, 군국주의 욕망에의 질책, 리얼리즘극의 골방을 구석구석 떠돌고
"추문", "산 자의 기록", "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천국과 지옥"의 사회 고발 드라마를 발표하면서
한편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하면 언뜻 연상되는 사무라이 활극의 전설들인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 "츠바키 산주로",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들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관계 조화, 그리고 서민들과의 호흡으로 자동적으로 정의를 부여받는 귀족주의의 옹호가
서부극의 존 웨인과 능히 비견할만한 사무라이극의 미후네 토시로의 강인함과 더불어 스크린에 올려진다.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이키루"가 영화역사상 남겨질 100 편으로 각별히 챙겨지는 바와 달리
개인적 선택은 "천국과 지옥"의 계급 해소의 불가와 자신의 작품군 자체의 총정리편인 "붉은 수염"이 우선된다.
더 이상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에 대해 자본-제작사들의 긍정적인 면모가 사라진 다음,
다른 감독들과 같이 제작사를 꾸리기도 하고 해외 자본과 감독들에게서 제작비를 구했던 후기는
무엇보다 이전의 흑백 필름을 버리고 칼라로 옮겨갔다는 확연한 시각적 차이점 말고도
"도데스카덴"에서 거지 소년을 구하지 못했던 빈민촌 유일의 노인이자 선각자의 심정으로 대변되는
스스로의 자살 기도의 시기 이후 우울한 영화 예술가의 초상이 반영된 시기이다.
빈민의 성과 죽음의 에너지를 발산하려던 에피소드 연쇄극인 "도데스 카덴(1970)"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찰 것으로 짐작되는 "마다다요(1993)"의 24년 7작품의 후기는
단순한 불가해한 노인의 무기력에서 비롯된 허무주의가 아니라
일본 내 자신의 영화 입지가 무너지고 해외에서의 인정으로 무대를 옮겨야만하는 시기로
첫 작품인 "도데스 카덴"의 방안 가득 붙어있는 전차그림의 다양한 색감이 환타지의 전차 불빛으로 반짝일 때
어머니를 정신차리게 해달라는 주인공 소년의 상상의 전차 운행은 감독 자신의 내밀한 심경 고백에 다름 아니다.
색감과 에로스의 밑바닥 "도데스카덴"에서
시베리아 숲의 시력을 잃어가는 사냥꾼의 몰락을 통한 감독의 자기 통한 "데루수 우자라",
원본에의 좁힐 수 없는 간격 이미지를 삼각 구도의 촛불로 형상화한 그림자 무사 놀이" 카게무샤",
다시 세익스피어로 돌아가 믿었던 영화의 본질로 야심차게 다가서려던 웅혼의 백기 "란",
소년과 중년 남성의 가출과 귀환, 결혼식과 장례식의 대비로 대지와 노년의 합일 염원 "꿈"
낡은 오르간음과 할머니의 귀신 이야기를 통해 가족으로 국가를 가려버린 "8월의 광시곡"까지
후기의 6 작품은 현실로부터 상기된 회의와 절망의 서민극과 대하사극의 화려한 치장 속에 숨겨진 한탄에서
중년이 되버린 일본 남성을 버리고, 소년과 학생을 선택하여 과거와 미래를 봉합하려는 노인의 일성이 담겨있다.
만약, 유작인 "마다다요"를 볼 수 있었다면 지나간 굿굿한 예술가적 삶에 대한 심경을 들을 수도 있었을테지만.
후기의 추천작은 아니 추천장면은 "카게무샤"의 오프닝 촛불 삼각구도이다.
본편 자체는 놀랍지 않지만,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 작품 전체에서 이 시퀀스를 정말 오랫동안 사랑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기 세작품 "란", "꿈", "8월의 광시곡" 과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 촬영시 크리스 마르께가 담긴 다큐멘타리 "AK"를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그간 번호 10까지 올린 정리되지 않은 감상문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를 구속하고 있던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느껴지는 7월의 여름 말일이다.
27. 란 亂(1985) : 예술은 권력이 되고, 눈과 머리를 벤다.
거의 결정적으로 질문은 단 한가지로 압축될 것이다.
만약 허용된다면 부차적인 질문 두어가지도 가능할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 의문문은 "나는 누구인가"로 집결된다.
원작 '리어왕'과의 변별점을 찾아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카게무샤"로 완전히 부활했을 구로사와 아키라는 다시 대작 사극 전쟁 드라마에 진출함으로서
자신의 노년 에너지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기 위해 그의 스탭진 전체를 대동하고 산기슭에 진짜 성을 쌓는다.
전작 "카게무샤"에서 영화 예술에의 본질로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몸-자본의 상처와 저항 등의 상흔을 결코 극복하지 못하고,
도둑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복
사 판본이라는 혼돈 속으로 수장되었던 기억의 자존심이
작품 "란"에서는 노장의 자신감이 도처에 부처의 자비심으로 승화된다.
마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마징가 Z의 헬 박사를 연상시키는
나카다이 다쓰야의 금방이라도 흔날릴듯한 백발, 움푹 패인 눈두덩, 창백한 흰빛의 안면과
별도의 클로즈업이 극중 인물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도 미디엄숏과 알아보기 힘든 롱숏의 카메라는
실제로 극 중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는 "내가 아닌 나"에서 "내가 없는 나"로의 진화를 보여준다.
허위의 노랑과 욕망의 붉음, 진실의 파랑 삼색군단이 "카게무샤"의 풍림화산 4색 군대를 연상시키고
원한의 궁극인 가족 파탄극의 팜므 파탈과 만물 인연에의 용서와 자비라는 보살의 양극이 균형을 이루며
극악한 군주 곁에 최후까지 동행하며 직선적인 풍자 노래와 민중으로서의 질책을 겸비한 광대 시종과
충직한 신하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며 배반의 처단이라는 쾌감과 군주에의 직언을 삼가치 않는 군신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바람직하게 인증하는 환타지적 계급의 양날개와 같다.
불타오르는 당시 일본 제작비로서는 고비용이었을 실제로 불타오르는 성채
리어왕의 딸들에서 아들로서의 일본 봉건 성주로서의 전환
이전과는 달리 감춰지지 않고 공개되는 대규모 군중 전투장면 등의 스펙타클을 잠시 잊고
다시 처음의 질문의 전제로 되돌아가자면
당연하게도 리어왕의 단순한 번안극으로서 "란"이 아니라면
극중 두 아들에게 버림받고 삶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늙은 성주(극중 일흔 70)는 다름아닌 감독 자신임은 운명이다.
모든 영화의 주인공이 감독의 영화적 도플갱어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주제의 발화자로서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임무를 띤 유일한 주체자라는 점에 착안할 때
나카다이 다쓰야가 "카게무샤"에 연이어 주역을 담당한 성주는 그해 75의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으로 번역된다.
여기서의 질문은 흔히 돌아오는 대답의 경로인
당시 구로사와 아키라의 일본 영화계 내에서의 굴욕의 경로를 기억한다면 쉽게 유추되는 허무와 좌절이기보다
극중 장님 피리 연주자와 둘째 아들의 부처같은 부인 스에, 그리고 광대 시종에게서 발설되는
젊었을 당시 성주의 정복 과정에서 불거졌을 만행과 피해자들의 원한이 도대체 무엇인가로 돌려져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로사와 아키라 스스로가 범했다고 고백하는 젊은 날의 비윤리적 만행의 정체,
극 중에서 두 번이나 부처님의 자비로운 인상을 제시하며 씻기고자 했던 악덕은 무엇을 가르키는가이다.
이 질문지를 슬쩍 넘기고 다만 노년의 좌절을 통한 허무주의로 작품 전반을 읽을 때 영화는 진정 허무해진다.
물론, 대답은 오리무중이다. 왜냐하면 감독 스스로 어떤 힌트도 상징도 영화 내에 심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물로서 장님이 된 적의 아들, 수급이 잘리운 적의 딸이자 자신의 며느리, 현명했던 셋째 아들의 사망
그리고 최종적으로 광기와 주지로 회귀하는 성주 자신의 운명론은 대답 대신에 인과응보만을 강조한다.
과연 구로사와 아키라가 리어왕을 경유하면서 후회했던 과거지사는 어디에 있는가?
즉,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기준점으로서의 '일자 一自'는 보여지지 않고 망극함만 가득하다.
이데올로기적인 억측은 가능하지만, 후기 들어 사라진 휴머니즘의 시선을 차마 다시 거론하고싶지 않듯,
초-중기 기치를 드높이 올렸던 전쟁 상흔에의 치유와 스스로 스승의 자리로 지도했던 자만을 떠올리고싶지도 않다.
그냥 제목 그대로 "어지러울 란 亂"이라는 기표 안에서 독자 각자의 기의를 밀어넣도록 하자.
"란 亂"은
감독 자신이 아카데미 공로상 자리에서 고백했듯이
영화를 결코 알지못하고
곧바로 내달려온 노년의 예술적 정신분열증 칼라영상 자기 보고서이다.
2
8. 꿈 夢(1990) : 꿈에 소년은 문을 나서 자연이 되고, 어른들은 집으로 돌아오려 유령이 된다.
8개의 각 에피소드 앞에 글이 있다. "이런 꿈을 꾸었다"
처절할 정도로 유행하는 꿈과 현실의 경계 파기를 노장에게 기대했다면 살포시 그 꿈 내려놓아도 좋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마치 전작 "란"에서 제기된 자기 반성의 사유서를 관객에게 둘러둘러 내밀듯
꿈 자체로의 인생으로의 유인, 즉 가야할 길, 경계해야 할 길, 가고싶은 길, 가게될 길로 꿈을 걷는 방식을 택한다.
그 곳에 관객의 자리는 때로는 찬란하고 안전하게 한편으로는 어둡고 불편하게 배치되어있다.
8편의 에피소드를 환경이라는 알레고리 안에 집어넣고 재단하는 것처럼 무익하고 속편한 방법은 없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거의 "환경"을 갑자기 소환하고 "데루수 우자라"의 후편을 기약하는 듯 하지만,
이전 구로사와 아키라의 어느 작품에서 환경이라는 주제에 심각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물론, 이전에 다루지 않았다고해서 이 작품 역시 아니라는 논리는 어설프다.
직접적으로 거론되는 3편의 에피소드인 "복숭아밭", "붉은 후지산", "귀신이 울부짖는다"와 더불어
간접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여우비"와 "물레방아가 있는 마을"까지 더한다해도
나머지 3편의 에피소드는 무리하게 환경의 아늑한 동굴안으로 가둬두기에는 일본말 그대로 무리다.
다른 방법도 있다. 8편의 에피소드 각각을 분리해서 별개의 것으로 요리해보는 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적으로 기준을 찾아둘 것을 몇 가지 찾자.
이야기는 두 명의 안내인에 의해 인도된다.
전반부 1,2 에피소드인 "여우비"와 "복숭아밭"은 남성 소년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여우의 결혼식 무리와 복숭아나무 신령들의 일본 고유 복색과 음율에 맞춘 우아한 동작들은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이후로 내려온 일본 전통 연극 양식의 빼어난 고요한 절제를
에피소드 내에서 등장하는 고흐의 햇살 가득한 필치의 칼라로 과시하려는 감독의
연모가 듬뿍 담겨 있다.
두 에피소드는 남성 소년의 환각으로 장식되지만,
어머니와 누나, 복숭아 나무의 소녀 정령은 모질게 아들과 남동생을 내몰거나 방치하는 바,
그녀들은 마치 소년들에게 집을 나서 세상과 직접 대면하라고 주문하는 듯 하다.
이에 두 소년 앞에 무지개나 잘려나간 복숭아 나무들이 호나하게 펼쳐질 때
영화의 배색과는 달리 감독은 90년대 어린 후인들에게 묵직한 성장을 기대함을 비친다.
그 간극에 여우의 결혼식과 복숭아 정령의 악극을 수놓아 가출의 길을 아름답게 하려는 감독의 장식은
집으로 돌아올 틈을 주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각성이 담겨질 때까지 방랑하도록 여는 주술과도 같다.
즉 , 다시 말해 두 개의 에피소드는 동물과 식물 각각의 자연 친화성을 드러내는 듯 하면서도
실은 무지개가 피어로으고 복숭아꽃 만발한 미래의 일본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나는 문을 닫고 대신 부담스러운 단검 하나를 소년에게 건네주고,
마치 그 단검이 베기라도한듯 잘려나간 복숭아 나무의 정령들은 다른 소년을 추궁하고 미래를 약속받는다.
다른 한 명의 안내인은 중년 남성이다. 이제 여자는 거의 부차적이거나 화면에서 배제된다.
길을 떠난 소년이 아직은 각성하지 못하여 집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도록 한 장치 아래에서 그는 떠돌게된다.
설사 그것이 앞의 두 소년 에피소드에 부합할 화가 고흐의 그림 속을 여행하거나
첫 에피소드와 대구를 이루는 행복한 장례식 행렬의 풍악이라 할지라도 그는 집으로 아직 돌아올 수 없다.
3-40대로 보이는 한 명의 배우에게 맡겨진 나머지 6개의 에피소드는 항시 집을 잃어버린 사내의 이야기다.
"눈보라"의 극단의 한파와의 사투가 차라리 앞선 두 편의 에피소드에 연결되는 환경 친화의 맥락일 수 있음은
눈보라의 악령으로 여인을 설정하여 눈의 이불을 덮어주는 시퀀스의 덜익은 환상씬에서 드러난다.
전편들과 동일하게 여성은 여전히 남성들이 집(캠프)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강압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작품 세계의 거의 모든 젠더는 유일하게 남성(남성화된 여성)이었음을 떠올리고
언제나 여성들은 조언이나 유혹, 팜므 파탈의 위치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에피소드이다.
"터널"의 전쟁혼령의 침묵은 전체 에피소드 중 독단으로 튀는 여전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전쟁론을 증언한다.
그는 지옥을 지키는 개의 두려운 짖음을 보여주지만, 결코 개로 하여금 홀로 살아남은 중대장을 물게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순순히 전멸한 중대 전체를 조용히 명령에 따라 저승으로 귀가시킬 정도로 현재의 일본을 신뢰한다.
여전히
전쟁 책임을 완곡하게 부인하고 저멀리 부모님의 소원을 언급해 서민주의로 슬쩍 투항하려는 의도는 깊지 못하다.
"까마귀"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화가 경력과 고흐에의 연민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로
화랑 안에 걸린 고흐의 그림 안과 밖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화가의 여행을 통해
마치 고흐의 그림들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재현하려는 감독의 세심한 노력은
마틴 스콜세즈가 맡은 고흐 연기와 특수한 화면 기법과 더불어
고흐가 갔던 자연에의 동경, 시간에의 강박을 그대로 담아오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동의가 드러난다.
예술가들을 열차에 비유한 삽입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후인들을 위한 격려이다.
하지만, 고흐가 자화상을 그리는 데 잘 되지 않아서 잘라낸 귀와 같은 신체 절단이 감독 자신에겐 무엇이었을까?
"붉은 후지산"과 "귀신이 울부짖는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것이라기보다
그의 영화적 동기이자 공동 연출자로 이름이 올려져있는 혼다 이시로의 에피소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고지라" 등을 통해 아수라장이 된 일본 국민들의 피란 행렬과 원폭에의 공포를 그린 혼다 이시로의 평생을
간략하게 두 편의 에피소드는 바다까지 내몰린 남자와 도깨비로 변해버린 인류로 그려진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에피소드 내의 주제나 익숙한 혼다 이시로의 연출력이 아니라
줄곧 화자로 등장하는 중년 남성의 황망한 위치설정이다.
감독이 투영한 사내는 이전 3편의 에피소드와는 달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지 못하거니와
어떤 죽음이나 도피의 확정 없이 그저 허우적거리고 두려워하는 무기력한 시선의 중개자에 머문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혼다 이시로가 바라보는 유년과 미래의 환경이라는 책무는 안내자의 성격으로 '차이'를 드러낸다.
소년의 가출은 무지개와 복숭아꽃비로 반겨지지만,
중년 남성의 그것은 방사능과 도깨비의 아우성으로 차단될 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오랫만에 돌아온 구로사와 아키라의 아름답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낙원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인
류 치슈의 말년(86세)가 생사를 달관한 듯한
마을의 대표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용히 물에 의해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의해 적절히 이미지화된다.
낙관적으로 마치려는 에피소드의 종장으로는 뜨근하지만, 한편으로는 엉성하고 둔탁한 면이 크다.
막무가내식 인생은 아름답고 삶과 죽음은 행복하게 받아들여야할 것이라는 훈계에 문법은 담겨있지 않다.
"꿈"은 문을 나서 집을 떠나야하는 소년에 부치는 밝은 미래와
언젠가 집으로 귀환하여야하지만, 아직 길을 떠돌거나 찾지 못한 중년 남자의 로드 무비이다.
29. 8월의 광시곡 八月の狂詩曲(1991) : 화려한 남성 대신에 할미와 손자들이라면 "미친" 노래는 불가능하다.
돌려 말하지말고 직접 가자.
두 가지 경우의 수가 가능하다.
( 그리고 아마도 이건 클린트 옹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대한 선배격일 수도 있다.)
하나는,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미 예상된 구설수와 논쟁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전쟁 책임에의 각성 없이 피해자들의 곡성과 동일한 제국주의의 사과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전작들의 화려한 색감이나 영웅남들의 비탄보다 가족주의의 단란함이라는 방패는 추잡스럽다.
예를 들자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홀로 우산을 쓰고 비바람을 헤치고 나가는 할머니는
"요짐보"의 미후네 토시로의 먼지 바람보다도 더 관객들을 영화 밖으로 쓸어내린다.
이건 하나의 고질병이다, 성인 남성이 나서서 답변해야할 자리에 감독은 언제나 여성을 배치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모자란 자리에 전작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던 단절된 가족주의를 들고와 보충했다.
가볍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역사 인식이 여전히 1945년 이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답게", "산 자의 기록", "꿈 - 붉은 후지산, 귀신이 울부짖는다 "의 연장선상에서
"8월의 광시곡"은 말년을 눈 앞에 둔 감독의(영화 속 할머니처럼) 응어리 진 한풀이이다.
그는 여전히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라고 믿고 있으며, 심지어는 미국이 여전히 전쟁 진행자임을 증언하는 용기도 있다.
알다시피, 이건 일종의 서민주의에 기댄 책임의 은폐와 방기론인데.
일개 대중이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 아닌 영화제 출품작으로 일본 노장이 필름에 담을 언어는 아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명약관화한 비난에 대해 그는 아리송한 가리개를 미리 올린다.
"8월의 광시곡" - 광시곡이란 흔히 영어로 랩소디로 번역되지만,
일본어 원제의 광 미칠 狂은 외람되지만, 스스로 영화가 미쳐있음을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다시 말해, 왜 조곡이나 애도가 아닌 미친 시의 노래인가에 달려있다.
영화 속 첫 음성은 이전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소녀 내레이션이다.
화면의 색감은 흔한 전원 드라마의 따뜻하고 화사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첫 장
면은 낡은 오르간을 연주하다가 "정말로"를 외치는 소년의 모습을 보인다.
"정말로"라는 극중 내내 반복된는 대사는 정확히 제목의 "광 狂"자와 연결된다. '정말로....미쳤다'
그리고 정말로 오르간은 극 말미에 고쳐지고, 장미꽃은 보이고 노래로 들린다.
심지어는 리차드 기어가 일본어를 구사하며 동감에 가까운 사과를 전하는 밤의 달빛의 아른함은 낭만적이다.
다시 비겁함을 꺼내고 싶지 않지만, 왜 저 장면에서 미국남성이 일본인 여성 노인과 손을 잡아야하는가?
정치-경제적인 함수 관계를 물고 늘이자는 것이 아니라, 늙은 미국 남성과 일본 남성의 조후는 왜 허락되지 않은가?
'귀여운 여인"에서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고 젊은 성매매 여성 노동자를 구원하는 적대적 기업인수자인 그가
기꺼이 비행기를 타고 이번에는 늙은 일본 여성에의 국가적 망령을 로맨스 무비처럼 달랜다.
이제껏 남성 국가주의를 고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갑자기 원폭 망령의 화해를 구할 때 여성으로 대체한다.
첫번째 내려진 결론은 여전히 전쟁의 피해자는 일본 국민이라는 인식의 좌표에 갇힌 감독의 역사인식이다.
그는 전쟁 전후의 어떠한 일본 만행에 대해서는 눈 감은 채 패전국으로서의 감당못할 기억을
원자 폭탄 투하라는 20세기 최대 사건으로 몰아서 쉽게 눈감고 묻어버린다.
간단히 어찌되었든 원자 폭탄 투하는 무조건 잘못된 방식이었다는 결의의 토로.(괜히 비바람 뚫고 우산 쓰겠나.)
여기에 식민지의 후예로서의 울분을 필요없이 과하게 섞을 필요는 없다.
비록 음모론이지만 당시 원폭 투하가
일본 천황 등의 수뇌부의 전후 존속을 위한 정치적 노림수와
미군의 원자폭탄의 군사적 실험이라는
중간 지점에 의한 서민 학살이라는 아합일 수 있음이
아마도 감독에게는 듣보잡이었나보다.
일본의 최초 침공지인
하와이에서 일본계 미국인 2세가
굳이 나가사키로 찾아오는 서사에 은유는 필요없다.
감독은 그야말로 더 늙기전에 원폭 시절을 미래의 축복으로 위장, 정면돌파한다.
희박하지만, 나머지 한 가지 경우를 거론하자.
대개의 클린트 옵빠께서 믿고싶어하는 초월적인 휴머니즘이라는 황홀한 아우라이자 드라마가 그것이다.
이 경우 전쟁의 상층부와 해당 국가의 대중은 완전히 분리가능하다.
파시즘이든 군국주의든 그것은 단지 일부 정치 모리배들의 광기적 국가 기획력일 뿐이다.
찾아가서 돌보고 애도하며 우리 곁으로 되돌려야할 주체는 어디까지나 서민으로 제한된다.
거시와 미시의 경계는 확연하니, 미시 내에서 영화 속 개미처럼 장미와 살아가는 대중을 감독은 추모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전쟁 책임론이 필요하며, 정치적 논쟁은 무익할 따름인 것이다.
이 가능한 추정으로 돌아오자면 영화의 가족주의 비겁함의 혐의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고,
하와이-나가사키는 거대 강국이 된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자라나는 일본의 손자들을 위해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와중에 정신 못차리고 이기심에만 빠져있는 일본 중년들을 질책함은 적절한 양념 배합이 되고,
물귀신 갓파쿠와 벼락 맞아 타버린 나무의 남녀 원혼도 같이 소리 죽여 자난삼아 전이시켜도 좋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진정으로 죄없이 숨져간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의 가족 복원극을 만들고 싶었(을 수도)다.
다시 말하지만, 식민지 후인으로성의 울분을 털어놓고 허탈함을 소화시킬 격분은 넘자.
감독의 혹은 혹자의 역사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제대로 정의되지 못했거나 다르게 만들어졌다.
"8월의 광시곡"은 작심하고 꺼내든 노장의 일본 옹호극을 가족들의 단란한 광기로 포장하였거나
우리 모두 고인들을 추모하고 사과를 받아들이세를 합창하는 낡아서 잘 먹히지 않는 오르간 음율이다.
29+1.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 AK(1985) : 크리스 마르께
= 선생님과 나열된 이미지의 조각들의 산란뿐이네.
크리스 마르께의 작품은 지금 한창 신뢰하는 번역가분의 자막이 올려지는 도중이라
작업이 종결에 이르면 별도로 언급하고 싶지만, 이번 회고전에서 같이 상영한 작품이라 간단히 짚고간다.
예전에 모 회원께서 그 해 자신의 영화로 꼽았던 "방파제"가 최근까지 자막화된 유일한 그의 작품이었지만,
가장 큰 유명세를 얻은 68년 이후의 신좌파 운동을 서사적으로 정리한 "붉은 대기" 등의 작품들도 곧 만날 수 있다.
크리스 마르께의 다큐멘타리 세계에 대한 소개는 차후 그의 작품을 차례로 만날 때로 미루고
이 글에서는 간단히 이번 회고전에서 만난 그의 작품 "AK"만을 언급하려 한다.
이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이 상암동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가 문을 연 이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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