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8 - 도데스카덴//데루수 우자라//카케무샤

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이제 구로사와 아키라의 빛과 어둠만의 미학은 사라졌다.

일본 영화계의 황금기들은 사라졌고, 유명 영화제작사들은 흥행에 더욱 민감해졌다.

초창기 일본 영화계의 작가,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는 운명을 달리했고

데뷔 이후 처음으로 5년이란 긴 시간을 쉬었다가 만든 최초 칼라 "도데스카덴(1970)"은 영화마냥 가난해졌다. 

고립된 예순을 넘긴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형의 죽음 방식과 같은 자살을 시도한다.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작가의 삶이란 죽음과 같고, 소설가의 가벼운 연필과 달리 영화감독의 필름은 무척이나 무겁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작품 속에서 투영시켰다고해도좋을

시무라 다케시와 미후네 토시로도 이제 더 이상 구로사와 아키라 작품에서 만날 수 없다.

(비록 시무라 다케시가 그의 마지막 배우로서의 숨결을 "카케무샤"에서 보였지만)

이후 4-5년에 한번씩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흔의 노익장은 타오르지만,

후기로 갈수록 초-중기 유지되던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휴머니즘의 자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대결과 미궁의 형식들은 쾌감을 생략한 시체더미들 속에서 허무만을 꽃피운다.

아무도 더 이상 역사적으로 해피하지 않고 꿈꾸는 자의 화려한 색감만이 눈을 어지럽힌다.

   

힘든 여정 끝에 도달했던 "도데스카덴"의 황폐함 이후 후기작들은

사냥꾼(데루수 우자라)은 그림자(카케무샤)가 되고, 전쟁(란)은 꿈(꿈)일 뿐이며,

패망의 시(8월의 광시곡)은 여전히 진행중(마다다요)이다.

70년대 이후 90년대초까지 근 20년간 7작품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지쳐버린 스스로를 고백하고

믿어의심치않는 자신만의 미학이 수놓인 거미집의 성을 축조하는 데 노익장을 발휘한다.

여전히 일본의 치유와 허실의 무의미한 구별을 버리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장의 일성은

우연하게도 70년대 이후 절망감의 조류와 맞아떨어지면서 작가의 완결된 필모 속에 안전하게 자리잡는다.

   

후기 구로사와 아키라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여 잡아오를 동아줄을 잃어버린 노인의 한탄이다.

일본 내 영화제작사로부터의 퇴출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의 참을 수 없는 현장 배제감은

후기작에서 멋들어진 팔자수염의 인간미 물씬 풍기는 해결사 남성성을 완전히 제거시켜버린다.

현실에서의 버림받음은 전후 일본에의 상처 치유라는 정치성 영화 일선에서 인간주의를 외친

감독이 그간 의혹의 눈짓만 보내던 자본주의에 불현듯 포위되어 쓸쓸히 흥행의 화살을 맞는 심경을 노출한다.

"라쇼몽"의 허실을 뚫고 아기를 찾지못하거나, 생존의 승리를 나눌 "7인의 사무라이"의 농부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23. 도데스카덴 どですかでん(1970) : "밑바닥"에 칼라의 타자들을 과하게 담으셨군요.

 

막심 고리키의 희곡을 번안한 "밑바닥"이 완연히 떠오르지만,

일견 찰스 디킨즈의 후기 작품 세계를 연상시키는 각양각색의 인물과 거대한 벽으로서의 사회와 편견,

60년대 중반 이후 전세계적으로 불타오른 자유스러운 성해방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최초 컬러 영화이자 동료 감독들 3명과 같이 제작사를 차린 후 먼저 흥행수를 노린

"도데스카덴"은 일본 국민의 무시를 받아 결국 구로사와 아키라를 자살 시도의 궁지로 몰아넣는다.

 

 

"멋진 일요일(1947)"과 "밑바닥(1957)의 10년 주기를 이어받듯

13년만에 다시 만들어진 빈민층의 삶은 이전의 두 작품보다 더욱 생기발랄하지만,

특별한 주인공이 없이 다양한 빈민층의 삶을 수도꼭지 우물 하나로 모으려는 감독의 연출이

다소 산만하여 중심을 잃어버려 뚜렷한 빛없는 스펙트럼이 되고 말았다.

성 관념의 해방과 가난과 억압이라는 두 요소는 따로 노는 데

극 초말을 장식하는 "도데스카덴"을 외치는 기차소년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에 놓여있는지

영화는 개별의 사연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두런두런 떠벌리고만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일본 곤충기", "인류학 입문" 등 일련의 삶의 원천으로서의 성이라는 언어 구사를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휘황찬란한 빨강, 파랑, 노랑 등등의 색감과

넓은 스크린의 빈 여백으로서의 증오와 회한의 정서는 그리 깊게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후배인 이마무라 쇼헤이가 여배우들의 신경질적인 몸짓과 광기, 증오를 육체의 날것으로

드러낸 것에 비해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여전히 점잖은 노인의 그것에서 멈추고 만다.

 

 

작품 내에서 유사 근친상간이나 스와핑, 성적 농담 등은

물이 졸졸 흐르는 힘없는 남성의 정력같은 수도꼭지에 모여든 동네 아낙들을 중심으로 구사되지만,

정작 본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확히 엎어지려는 긴장감이 다가서기 전에 생략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개인으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성본능의 칼라 미학도 였겠지만,

이미 후배들이 다 파놓은 우물에 가서 목을 축이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여기에 역시나 늙은 세공사 노인이나 불륜에 정신을 잃은 남자 등을 통해서

보수적인 휴머니즘에 여전히 살짝 기대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거니와

아버지-아들 거지와 끝없는 노동을 해야하는 소녀, 뒤틀린 신체의 중년 사무원 등을

오가는 편집 사이에는 특별한 고리가 없이 그저 옮겨지는 카메라만 덩그러니 존재할 뿐이다.

 

"아메리칸 뷰티"의 장미꽃 소녀와 중년남자의 성적 욕망의 기원일 수도 있는 위 장면사진은

그저 "가만히 있어봐"라는 남성의 대사처럼 그대로 가만히 있은채로 조명의 불이 꺼진다.

차마 완전히 아래로 떨어지지 못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점잖음은

거지 소년의 죽음을 비추는 파아란 얼굴빛과 가장된 노란 태양처럼 그저 화면 구성의 미학으로만 남는다.

 

 

"도데스카덴"은 보이지 않는 전차를 운전하는 미친 소년의 외침마냥

구로사와 아키라의 회심의 일격이 되기에는 빈민들의 색감이 너무나 화려하다.

남자들의 지저분한 얼굴과 손톱에 낀 검정 그을음과 때와 달리 여성들이 화려한 복색을 하고

단순 일꺼리로서의 종이꽃들의 색감이 너무나 붉게 그려질 때

정확히 감독의 중점이 가난과 성과 도덕 어디에 머무는지 혹은 그 모두를 아우르는지조차 모호하다.

 

 

아버지와 남편들은 광인이거나 너무 순박하고 혹은 무능력한 비윤리성 안에 갇혀있지만,

어머니와 아내들은 능히 인내하거나 당당하며 전혀 꺼리낄 것 없는 태도라는 점도

익히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들에서 봐왔던 익숙한 풍경들이다.

도대체 이전의 미후네 토시로와 시무라 다케시가 보여주었던 강인하고 지혜롭던 남성-스승의

자리는 이제 그들 페르소나 2인과 더불어 완전히 사라졌다.

비록 노인 세공사의 인간미가 없진 않지만, 그 역시도 거지 소년의 죽음을 방지하지 못한다.

이쯤되면 이미 구로사와 아키라의 70년대의 출발은 아니 후기의 시작은 전의 상실된 것이 아닐까?

 

 

"도데스카덴"은 화려한 색감으로 너무 번져버린 빈민극이 텅 빈 공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성적 도발의 금기 위반도 결핍한 채로 '아버지'를 부인하게된 감독의  현실 자각이다. 

 

 

24. 데루수 우자라 Dersu Uzala(1974) : 구로사와 아키라, 절망을 호랑이에게 고백하다.

 

이 곳은 더 이상 일본이 아니다. 사무라이도 의사도 형사도 공무원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의 전체 작품군 중 유일하게 배역 누구도 일본인이 아니거니와

사회라는 인간 중심의 시간을 중지키시고, 도시라는 자본 역시도 퇴출시킨

자연이라는 불가능한 시공간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왜 갑자기 들어왔을까?

 

 

"도데스카덴" 이후 자살 등 실의를 겪은 노인이

대개의 평문들이 지적하는 문명//자연 이분법의 어리석은 도식을 꺼내들고

사냥꾼의 총이 가지는 노마지지를 신비화하며 사내들의 동성성을 찬미하고자

시베리아의 차디찬 벌판과 산 숲에서 멸종될 호랑이를 카메라에 담았을까....?싶다.

 

 

감독의 전작에서 뚜렷이 드러나듯 작품의 주인공은 감독 자신의 의지 구현체라면

갑자기 숲 속으로 뚝 떨어진 이 작품의 사냥꾼 노인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도외시한 문명//자연의 황당한 이분법 구사의 장인경지를 찬미함은 허망함에도

사냥꾼과 감독 자신을 절연시키려는 본능적인 감각이 돋아오름은 

전술했듯이 구로사와 아키라 전작에서 유일하게 일본 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기실 영화 내내 역력히 흐르는 대결의 구도 문명 대 자연이라는 허상을 감독의 전작들에 꿰어서

허와 실의 저 너머에 도사린 인간이라는 존재론으로 길어올림은 그리 힘든 작업은 아니다.

그건 마치 저 장면사진 속에서 해와 달 그리고 영사기를 뜻하는 측량기 사이에

구로사와 아키라의 기본틀인 삼각형으로 다시 놓인 문명인과 자연인을 이미지화한 구도에서도 능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간단히 감독의 내심이야 어쨌든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이야말로 진정한 허상임을 

본질론을 부정한 이후 모든 것은 단지 스펙트럼 위의 부단한 흐름이라 내세운다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관계와 절연이라는 장치가 1905년 러일 전쟁의 종결이라는 역사적 시사점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구로사와 아키라의 내적인 절망을 고백하려 푸근한 이국의 자연으로 돌아간 결과로 읽힌다.

 

일본 내 정치가들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과  제작자들의 흥행에 대한 압박심리에 반하여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사냥 기술을 하나의 경지까지 이룩한 노 사냥꾼의 원작 소설은

당시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처지에서 얼마나 반가웠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영화 내에서 문명을 대변하는 군인 대장(까삐딴)이 그리는 등고선이 담긴 지형도는 영화의 시나리오에 다름 아니고

젊은 군인들조차 맞추지못하는 흔들리는 줄에의 정확한 사격은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영화 문법이 된다.

까삐딴과 데루수 우자라가 서로를 한번씩 구하는 인연이야말로 영화 스탭진의 집단 노력이자

구로사와 아키라가 바라는 제작자 혹은 정치가와 영화 감독이라는 자리의 협연일 것이다.

 

후반부 주인공 데루수 우자라가 도시로 가서 까삐딴의 아들에게 추억을 녹음시키는 장면은

일면 유언장처럼 우울하고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의 기술과 추억에 대한 전수라는 측면에서 자존심이 느껴진다.

도시 문화의 규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등을 구부린 채 벽난로 앞에서 앉아만 있는 데루수 우자라에게서

일본 국내 영화제작자들에게 버림받은 노감독의 심경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 나아가 그는 까삐딴이 주는 신형 장총 때문에 강도 살인을 당하여 곧 죽게되는데

여기서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이 외국 자본에의 의존에 대한 불안한 염려가 감지된다.

그는 일본 영화의 혼(극중 호랑이와 숲의 신)이자 관객들에게서 버림받은 자신을

시력이 점점 더 떨어져가는 사냥꾼 데루수 우자라의 무릎 꿇은 아픔으로 표현하기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데루수 우자라"는 문명/자연의 불안한 이분법의 미학이 주는 쾌감을 전면에 내세워

구로사와 아키라 자신의 일본 내 영화입지의 단절을 고백하는 비망록이다.

 

 

25. 카게무샤 影武者(1980) : 대상 a는 영원한 결여로 남을지니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가 있다.(할아버지도 있는 듯 한데 안 보여준다.)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다.

영주와 영주의 동생과 영주의 그림자무사-카게무샤가 있다.

이른바 구로사와 아키라의 3 三 삼각구도가 반복된다.

 

 

이것은 현실 저너머의 절실히 염원하지만 결코 복사될 수 없는 대상과

현실 속에서 복사품을 유통하면서 질서를 구축하고 안정해야하는 법과

오직 이미지로서만 그를 향유하며 결국 자신의 이미지를 잃고 타자의 욕망안에서 타살되는

반 거울단계의 우화이자 죽음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소혼곡 피리이며,

난-너 라는 간결한 2자 관계를 넘어선 원형-희구-모사의 3자 관계의 불구의 망극함이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결여된 실체이자 이미 사라진 원본은 그림자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다케다 신겐 영주는 그 자신이 다케다 가문의 실체이자 그림자이며 욕망이 된다.

그가 결핍된 현실에서 카게무샤와 영주의 동생과 가신들, 심지어는 그의 적들조차

정확히 다시 반복되는 3 三이라는 숫자의 시간동안 그의 결핍에의 충만함을 환타지한다.

영화 속 누구도 감히 다케다 신켄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의 초상이다.  

위 장면 사진에서 그만이 검은 그림자를 가질 수 있는 유령이자 실체이다.

 

 

그의 우측에 자리한 다케다 신겐의 동생이자 혈연의 카게무샤인 가족 내 최고 중신 노부카도는

현실 속에서 다케다 신겐의 부재를 채우는 실질적인 행위를 지도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이 다케다 신겐이 될 수는 없거니와 최종적으로 자신의 무력함 안으로 추락한다.

( 그는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어떤 지도력도 내오지 못하고 무기력하다. )

형에 대한 그의 복제(카게무샤)는 혈연정치적이지만, 역시 그도 다케다 신켄을 대역할 수 없다.

그의 역할은 정확히 그림자가 실체처럼 보이게하는 촛불이자 가리개이다.

하지만, 그가 주인공 카게무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법은 자신의 것이 아닌 사라진 형의 언어이다.

현실 안에서 그는 카게무샤에게 명령할 수 있지만, 결코 이전의 카게무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케다 신겐이라는 원본의 자리로 감히 올라갈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다케다 신겐의 목소리를 만들 수는 있지만, 발화의 주체는 될 수 없다.

그에게는 그림자도 촛불도 배당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그림자도 실체도 아닌 애매한 중개자다.

 

 

그들과 카게무샤 사이에 촛불이 있다.

왜 촛불은 다케다 신겐과 그의 동생 노부카도 사이가 아닌 카게무샤-그림자무사 앞에 자리하는가?

환해야할 영주의 방에 왜 촛불은 달랑 하나뿐인 것인가에 대한 같은 질문의 다른 형식.

답은 이미 나와있다. 그것은 그림자를 누가 소유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그림자로 지시되는 반영 이미지조차 오직 다케다 신겐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공식,

부연하자면 결코 이전의 카게무샤인 동생과 현재의 카게무샤는 결코 그림자를 소유할 수 없어야한다는 법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자 影는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욕망해야할 잔여물이다.

 

 

마지막으로 나카다이 다쓰야가 연기하는 카게무샤, 영화의 주인공이 왼편 '아래'에 있다.

삼각형의 툭 튀어나온 외톨이 꼭지점처럼 다른 이들의 재물을 훔쳐야 살 수 있는 도둑 사내가 있다.

막 사형장의 죽음에서 길어올려진 그는 이제 영혼이 없다, 대신 이미지만이 그의 새로운 명줄이 된다.

영화의 첫 대사는 다케다 신겐의 간결한 한 마디 "닮았다"이다.

단지 유사 이미지만으로 주체가 타자의 욕망(죽음 이후의 3년 지속)에 충실히 동원될 수 없기에

카게무샤의 직업은 도둑, 즉 타인의 물체를 승인없이 가져와야하는 무법일 때

완전히 확정된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질서 즉 죽음이 동원되고 그것이 물이라는 생사 이미지 아래로 가라앉을 때

결국 도둑은 기어이 진정한 이미지의 도둑 카게무샤가 되기를 스스로 이전의 카게무샤에게 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안면(신체의 조각)-기표안에서 유지될 뿐  전체 몸-기의로 전환될 수 없다.

그가 가짜 영주임을 알아보는 영민한 감각의 소유자들에게 이미지는 쉽게 발각된다.

다케다 신겐의 손자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지만, 

꼬마 역시 다케다 신겐의 유사형질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는 단지 친근함이라는 가장만으로 소년을 복속시킬 수 있다.

소년이 사라진 다케다 신겐에게서 거부하고 싶었던 위엄이 사라졌을 때 소년은 그를 대체물로 쉽게 승인하는 것이다.

다케다 신겐의 냄새를 기억하는 애마와 그의 등(앞면이 아닌 뒷면) 흉터를 기억하는 첩실들에게는

감히 거부하고 싶었던 어떤 반감의 기억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 이는 나-너 관계의 재귀환극인 "마틴 기어의 귀향"과 비교할 때 즉각 발견된다.)

 

 

다케다 신겐의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욕망한다.

아직 아버지의 법을 체득하지 못한 손자와는 달리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인정투쟁 속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그들은 다케다 신겐이 남긴 그림자의 잔여물들을 받아들일 어떠한 준비자세도 없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당시 정신분석학적으로 살해하지 못한 아들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욕망해야하는지

근원조차 잃어버렸고 3년이라는 기간은 유교적 탈상의 시간과 더불어 아들에게 주어진 유예의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결국 사랑해야할 어머니의 자리를 부재시킨 상황에서도 기어이 햄릿형 자멸에 던져진다.

즉, 그는 다케다 신겐의 진정한 카게무샤가 자신임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미지를 부인하는데 몰두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그림자를 깨뜨리는 외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피리 음율이 산 山 = 다케다 신겐을 움직이게 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장례식이 치뤄진 다케다 신겐을 위해 가부키 1인처럼 추모곡을 올릴 때

그들은 다케다 신겐이라는 그림자 기의를 대체할 자격을 말이 아닌 음악으로 취득한다. 

 

 

'카게무샤"의 제목이 나오기 전 배치된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전체에 다름 아니다.

영화의 본편은 오직 이 오프닝에 대한 역사적 전쟁 드라마일 뿐이다.

서양이라는 무기(조총, 양의사, 포도주)를 가진 오다 노부나가가

후지산에 웅크린 구식 다케다 신겐의 결핍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그림자들의 제거,

풍림화산 風林火山의 제각각의 갑옷을 입은 군인들의 결코 보고싶어지지 않아 삭제된 처형,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5년 연상이었던 데뷔작 이후 동거동락했던 시무라 다케시의 마지막 출연 등은 부차적이다.

 

 

오히려 작품 전체의 알레고리를 넘어 현실 속의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거미집의 성" 을 제외한다면 거의 처음이라 할 역사 전쟁극의 서양 자본과의 협연 도전이

아멘을 외치고 포도주를 음미하는 장면만큼이나 행복했는지

그림자의 창조주, 그림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일흔 70의 노년 스스로가

영화라는 그림자 놀이에 '거의' 다가갔다고 상상했는지 묻는 일이야말로 본연이 된다.

 

 

 

"카게무샤"는 "라쇼몽"이 생사의 문앞에서 진술했던 완벽한 기의라는 존재 부정에 대해서

흑백의 그림자를 화려한 색감 가득한 전쟁 놀이라는 장치로 가득 메운 원본 상실에 대한 애상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