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16번 만날 수 있었다.
나루세 미키오는 1905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
13. 안즈코
杏っ子 (1958) :
너의 등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세로줄이 일렬로 그어져있고 그 위에 영화 제작진의 이름이 붓글씨로 하나씩 흘러간다.
이보다 더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보일듯말듯 가느다란 손금 혹은 실핏줄처럼 보이는 종이 속 나무결이다.
이제는 나루세 미키오의 오프닝 타이틀에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문득 그 선들이 글자 뒤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검고 선명한 글자 아래 눌려버린 채 본래 자신의 몸에서 강제이탈되어 기이한 유배지로 유형된 가
혹한 운명을
일종의 스펙타클로 여유롭게 즐기는 제3자적 관객은 어느새 가학자의 위치를 점할지도 모른다는 자책에 불안해진다.
아마도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 내 여인들이 어떤 운명을 경유하면서 존재론화되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
관객에게만 오프닝 타이틀의 힘없는 나무결의 흔적은 새삼 의인화되면서 가려진 운명의 뒤안길을 연상시킬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나도 알다시피 본편에도 여성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운명에 빠져들게되는가에 대한 특별한 자각없이
어느 순간 불행의 무덤으로 파묻혀버리고 조력자가 있거나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프레임 위에 노골적으로 자신의 등 뒤를 허락함으로서 무방비 여성의 역사를 지속한다.
개인적으로는 당대 여배우들의 만찬이라할 1956년작 <흐르다>와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 페르소나인
타카미네 히데코가
생의 수렁 속에서 점점 지쳐가는 전형을 반복했던 1960년작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사이에 본편을 위치시키고 되고,
카가와 쿄코라는 여배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밑바닥>과 <나쁜 놈일수록 더 잘 잔다>의 중간 지점과 더불어
2014년 여성영화제에서 여배우가 직접 내한했을 때 받은 친필 사인으로 기억될 나루세 미키오의 <엄마>로 정착된다.
그녀는 최근 작고한 하라 세츠코와 타카미네 히데코와는 달리 말년을 은거하지 않고 계속 활동을 이어갔는데,
언뜻 보기에는 두 여배우의 외모 중 눈, 코 부위를 조금씩 변형한 듯한 얼굴로 1931년생의 20대 여배우로 활약했다.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에서 본편의 선배격이라면 당연히 1952년작 <산의 소리>일 것이다.
흡사,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 드라마로 추정할만큼 기이한 <동경 이야기>의 예고편격인 <산의 소리>에서와 같이
본편에서는 굵은 선의 외모와 중후한 연기라는 표준형을 지속한 배우 야마무라 소우가 본편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며느리가 아닌 딸과의 관계에서 전작 <산의 소리>의 불가해한 혈연 관계의 흔적을 이어나간다.
즉, 본편에서 야마무라 소우는 카가와 쿄코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가능한 감정이 배제된 개입 불가의 좌표에 머문다.
그러므로, 본편의 질문은 여전히 나루세 미키오 세계의 그것과 동일하다.
왜 그녀는 운명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는가? 혹은 아버지는 왜 그녀를 방치하는가?
이것을 동적으로 번역하자면 왜 그녀는 스스로 혁명하지 않는가로 고쳐쓸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14년 2월, 5월의 나루세 미키오와의 12번의 여정에서 이는 이미 수회 언급된 바 있으니 반복할 여지가 크지 않다.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들은 동시대 다른 일본 작가들의 캐릭터들이 점유한 위치와는 차별화된 채로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의 그녀들과는 또 다르게 피학적이거나 순종적인 전근대적인 이질감의 미학으로 점절되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의 그녀들은 스스로가 운명의 비극 안으로 추락할 때 자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본편에서 유명 소설가의 딸 쿄코는 수많은 신랑감과의 만남을 거의 일회성으로 소비하고
갑자기 자신에게 청혼한 책 대여점을 운영하는 료키치의 청혼을 받아들이는데, 이 대목은 무척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인 유명 소설가가 딸과 결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관계를 예감했다고 말하는데,
바로 앞의 대사인 쿄코의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라는 다소 미온적인 반응과 비교하자면 격앙된 느낌이다.
갑작스런 청혼의 사유도 모호하지만(료키치는 쿄코와 선을 본 남자의 군 경력이 추잡하다고 하지만 밝히지는 않는다.)
아버지인 소설가가 남자는 추잡한 동물이라고 하면서 추잡한 남자에게 잡힌 거라고 덕담을 늘어놓는 장면은 일종의 복선이다.
물론, 이전 장면에서 쿄코는 싫고 좋음을 명확히 밝혔다는 것을 노출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료키치에 대한 애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쿄코는 어느 순간 청혼에 응하고 결혼하여 신혼 여행을 가는 기차에 남자와 동승한다는 것은 일종의 점프컷이다.
기차 좌석에 앉아있는 쿄코의 얼굴이나 신혼 여행지 숙박 업소에서 보이는 그녀의 불안감은 도무지 해명되지 않고 지속된다.
여기에 또다른 모호함을 추가하는 것은 아버지인 유명 소설가의 자리다. 언뜻 그는 무척이나 합리적이며 개방된 지식인이면서
단 한번의 양장을 제외한다면 작업복이나 평상복을 입지 않고 일본 전통 복식을 착용하면서 삶의 순리를 인격화한 그는
불행한 딸의 결혼생활은 물론 어쩌면 명확하지 못했던 딸의 결혼 결정을 의도하지 않게 떠미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 자리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산의 소리>와도 동일한 맥락이면서도 반역적인데
이혼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딸의 선택에 일임함으로서 설득이나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은 냉정한 아버지의 차별화는 보인다.
이는 나루세 미키오는 물론이고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에서도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조력하는 것과 비견할 때 이질적이다.
물론, 아버지가 딸을 완전히 내팽개친 것도 아니고, 딸의 살림집을 방문하거나 물품을 구입하여 주고
사위의 소설을 읽거나 출판업자를 소개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집으로 딸의 거처를 옮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위의 난장이 기물 파손으로 극도로 치달은 밤이 지나고 쿄코와 료키치의 거처는 옮겨져있다.
왜 그는 장인으로서 사위에게 직설과 충고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딸에게 이혼을 종용하지 않는 것인지 불가해하다.
어느 순간에는 유명 소설가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장인과 사위의 유사함으로 인해 동일성의 이형분리가 아닌지 의심하게된다.
어쩌면 본편의 어처구니없고 괴기적인 면모 혹은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관객은 고개를 돌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결말부에 아버지 소설가가 내뱉는 대사' 남자도 손해다, 여자는 영원히 손해다'라는 말을 새겨들어야한다면
이제까지 본편이 진행해온 서사는 결국 아버지가 딸을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사위의 모습으로 분신하여 고문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에서 무수히 노정된 남자들의 캐릭터가 실질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거죽으로서 료키치는 그저 알콜 중독과 무능력한 예술가의 면모로 위장된 아버지의 또다른 이면에 불과할 수 있다.
이쯤되면 본편의 목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그 저의를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아버지의 희망 고문과 남편의 절망 고문의 냉온탕을 오가는 쿄코의 등이 프레임 가득 채워지는 두 번의 장면은,
특히 엔딩에서의 그녀의 뒷모습은 그간 멜로드라마를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을 나락으로 전시했던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가 혹여 가학의 쾌감으로 들떠있는 것은 아니지 묻게되는 악취미로 관객을 유도한다.
다르게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나루세 미키오는 전후 당대 일본 남성들에게 면죄부를 내민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실상 전쟁 당시의 추잡한 동물로 호명하고 그에 의해 학대되는 여성을 일본의 실존으로 본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아버지가 쓴 소설과 남편이 쓴 소설을 단 한번도 읽지 않은 쿄코의 자세가 자못 의미심장해진다.
<안즈코>는 다시 반복되는 나루세 미키오의 운명 앞에 주체적으로 서지 못하고 아득히 추락하는 여성 잔혹사이며
국가-아버지-남편의 동일이형의 가학으로 인해 폐쇄된 미로 안에 갇혀버린 인민-딸-아내의 피학적 실존극이다,
14. 흐트러지다
乱れる(1964) : 대자본에 밀린 꽃은 피어날 수 없다.
제목과 주인공 가야마 유조 탓인가 감독의 유작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의 엔딩이 떠올라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나루세 미키오 -
타카미네 히데코의 조합과 무능력한 남성 캐릭터, 연대라고는 불가한 여성들 등의 익숙한 조합은
본편 안에서 감독의 세계 내 자본주의의 비열한 경쟁 구도가 확실히 표면화되는 구도 아래 파묻혀버린다.
물론, 가장 튼튼한 근골은 여성 캐릭터의 수난이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자본주의 시장 내부의 비정함에 시선을 더 쏟는다.
오프닝에서부터 이는 증명되는데, 동네 슈퍼마켓의 1주년 세일에 다른 소매점들의 한숨이 더해진다.
급기야는 달걀 등을 판매하는 소매점 가장의 자살까지 덧붙여지면 본편의 좌표가 어디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적어도 초중반에 이를 때까지 본편의 좌표는 멜로 사회극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슈퍼마켓 경영진들이 술집 여종업원들에게 제한된 시간 내에 삶은 계란 많이 먹기 게임을 시키고
상금을 내걸 때
그것을 저지하는 이가 남자 주인공 코지라는 점은 사회 드라마로서의 인증을 가중시킨다.
코지가 기존의 나루세 미키오 세계 내 남성들과 구별되는 은근하게 숨겨진 남성성을 노출시키는 과정에서
위 술집 내 먹기게임을 배치한 것이라기보다 자본의 광란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가 먼저 앞선다.
본편 이곳저곳에 여성 수난극과 관련없는 사회드라마적 기류가 엄연히 적지않은 분량을 차지할 때
그것을 본편의 얼개와 연관시키는 읽기는 오직 주인공 레이코(
타카미네 히데코 역)을 소매상과 등식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매상이란 슈퍼마켓 즉 거대한 운명 앞에서 중심없이 흔들리다가 존재 자체를 부인당하는 여성의 다른 기호다.
실제로 극 내부에서 남편을 잃고 18년간 전후 일본에서 한 가정을 일으킨 것은 며느리이자 미망인인 레이크로 호명된다.
기이한 것은 왜 시어머니, 두 시누이, 막내 남동생의 역할은 부여되지 않는가에 있다.
여기에는 또다시 나루세 미키오의 관습적인 여성 수난을 위한 가혹한 장식으로 읽는 가닥과 더불어
전후 일본 하에서
여성, 특히 젊은 미혼여성이나 어머니 등이 통과했던 빈곤과 생존 경쟁을 사회극적인 시선으로 보는 양갈래가 제시된다.
물론, 그 두 방향은 사실상 거의 전술한 바와 같이 수난극 아래서 하나로 통합되어 분리불가하지만,
가끔 본편에서의 소매점 자살같은 주변 인물들의 몰락을 담을 때 영화는 골격 너머에서 다른 발언을 하는 듯 하다.
슈퍼 마켓의 할인 홍보가 반복되거나 소매점 상인들이 마작 놀이에 자폐적으로 침몰할 때 이는 수회 반증된다.
초반부 30분까지의 이같은 사회 드라마적인 방향성은 레이코의 소매점을 코지와 그의 매형이 슈퍼마켓으로 전환시키려는
서사에 이르면 전술한 바와 같이 소매상=레이코라는 등식 하의 운명 공동체를 관객으로 하여금 착안하게 한다.
소매점의 폐업이 곧바로 레이코의 퇴출과 연관될 필요가 없음에도 영화는 굳이 그 자리에 시동생의 사랑이라는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형사취수
兄死娶嫂의 예감된 비극적 멜로를 삽입함으로서 이를 성사시킨다.
기이한 것은 냉정하게도 카메라가 스스로 집에서 나가려는 레이코를 바라보는 시어머니, 시누이의 시선을
동일한 숏 안에서 거의 고의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감추지 않으면서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에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에서 여성 동성 사회의 꿈은 1956년작 <흐르다
流れる>에서 대표적으로 재현되지만,
그들은 결코 연대나 섣부른 페미니즘의 구호 안으로 포괄되지 못한 채 반목하거나 서로에게 등을 돌리면서
그저 여성 수난극의 또다른 요소로서 기능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 멜로드라마를 고집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결코 다초점 혹은 다자간 통섭의 형식으로 옮겨가지 않고 오직 1인칭에만 안주한다.
비극에 있어서 특히 멜로 드라마 안에서 인물은 다원화되는 것보다는 고립된 개체로서 감정마저 유폐시킨다.
다시 말하지만, 이같은 여성 수난 1인극의 형식 하에서 본편의 사회 드라마적 초반부는 이색적인 것이다.
오프닝에서 삶은 계란 먹기 게임을 벌이는 술집 여종업원의 얼굴들을 스쳐가는 카메라나
코지와 하루를 보내고 그의 시계를 돌려주려 온 젊은 여성과 주인공 레이코의 대화의 엇박자는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론이지만, 가령 동일한 여배우
타카미네 히데코가 주연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서
점점 더 쇠락하는 술집 마담의 위치는 본편의 소매점의 상황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의미부여이 오류일 수도 있다.
상영 후 48 여분이 지난 후, 즉 코지가 자신의 형수 레이코에게 사랑을 고백한 이후부터 영화는 급격히 멜로화된다.
사회적 혹은 가족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과격한 장르적 공격은 그리 깊게 파고들지 않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막장극과의 밀당적 호흡 고르기가 관객으로 하여금 답답함 혹은 기다림을 유발시킨다.
결국 레이코가 시동생 코지를 불러내는 장소가 사찰 근처라는 점은 마치 오프닝에서 그녀가 코지를 경찰서에서
신원 보증을 하고 석방시키는 것과 은근히 비견되면서 한편으로는 법과 종교, 양자의 윤리를 비스듬히 흐르는 듯 하다.
본편의 제목 '흐트러지다'가 곧바로 내밀어지기 전에 영화는 장르의 규칙대로 주변인들을 호출하여 숨가쁨을 상승시킨다.
전술한 소매상의 폐업과 레이코의 가출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방관과 합작으로 발판이 마련되고
이에 결코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레이코는 코지와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봉인한 채 낙향을 결정함으로서 1차 관문을 닫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지의 역할이 방 내부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서성이면서 언성을 높여 두둔하는 것에 있음은
이후 코지가 레이코와의 관계에서 어떤 종착점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복선일 수 있다.
본편의 백미는 역시 낙향하는 레이코를 배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차에 탄 코지가 편집되는 순간마다 조금씩
기차 좌석의 난간에 기대는 자리에서 세컨 너머, 두 칸 너머, 바로 뒷 자리, 그리고 마주보는 자리로 옮겨가는 장면일 것이다.
중간에 레이코가 기차 창 밖의 신혼부부의 사진 촬영을 보거나 코지가 열차 출발 시간에 맞춰 국수를 먹는 것도 동일 맥락이다.
레이코의 변심으로 코지와 오이시다 역에 내린 이후의 상황은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의 엔딩에 대한 절반의 예고편이다.
남자의 죽음 혹은 자폐화로서의 엔딩은 여성 수난극에서 실은 여성의 죽음과 동전의
양면으로서 배치되기 마련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일념에도 불구하고 엔딩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못본 척 하기는 어렵다.
<흐트러지다>는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 속 전형으로서의 남성보다는 건재한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 예측되는 죽음 부재극이며
사회 드라마로서 자본에 쫓기어 소매점을 폐업하는 가난한 상인의 운명을 여성 수난극 안에 이질적으로 삽입한 정결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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