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보려는 글입니다.

 더 탑, 세계 최초의 온라인 가상현실 게임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게임과 비교를 불허한다는 타이틀을 내걸고 홍보를 시작한 게임으로, 얼마나 자신감이 철철 흘러넘치는지 그 흔한 CBT조차 없었다.

물론, 그만큼 오만하고 자신감을 가질 만큼 게임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간간히 드러난 예고편은 정말 현실과 비교를 해도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케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진짜 사람에 비해 부족함, 어색함 하나 없는 무수히 많은 NPC들과 거대한 스케일, 무수히 많은 스토리와 설정들은 정말이지 오랜 세월에 걸쳐 혼신을 다해 만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면모가 엿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혁신적인 것은 접속 방식으로, 그저 금속 재질로 된 머리띠만 쓰면 언제, 어디서나 접속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기존 증강현실게임보다 더 간편한 접속 모듈과 비교도 하기 힘든 수준으로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들 떠들어 대기도 했고 이 때문에, 이에 대해 안정성이나 사기에 대해 말이 무수히 많이 나왔지만, 오늘이 바로 더 탑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는 날짜였다.

 

‘게임만 하는 백수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부사관으로 한동안 취직걱정 없었지만, 전역을 한 지금은 그저 집에서 게임이나 하는 백수로서 취직걱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걱정을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겠답시고 한쪽 구석으로 미뤄둔 채 새로운 게임인 뉴 월드에 접속한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적당히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은 남자답게 제법 잘생겼고 운동도 보충제를 먹어가며 꾸준히 해 온 터라 제법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가 셔츠 위로 드러나는 이었다.

그동안 모아온 돈이 결코 적지 않은 데다, 투자하는 곳이 이자가 상당히 높은 탓에 당분간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뭐 이렇게 단순하지.’

 

캐릭터 생성이라면 으레, 커스터마이징에서 많은 시간을 쏟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게임의 캐릭터 생성에는 그 흔한 커스터마이징은 커녕 스텟이나, 종족같이 무엇 하나 고르는 것 없이 그저 캐릭터 명만 입력하고 바로 ‘탑을 오르시겠습니까.’ 라는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렇다, 라고 대답을 하자 세상이 무너져 내리더니 시야가 점멸됐다.

 

번진 수채화마냥 무너져 내리던 세상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보는 것을 택해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만큼 장관이었던 터라,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부지 전체가 초원으로 낮게 자라난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가득했고 드문, 드문 그와 같은 플레이어들이 환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환영합니다. 저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을 줄 가이드인 가야라고 해요.”

 

검은색 개량 한복에 검은색 머리칼과 눈동자, 비녀하며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지만,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뽀얀,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칼처럼 예리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아이신입니다.”

 

아이신, 별로 의미있는 닉네임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극히 보기 드문,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순간 넋을 잃고 바라봤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선선히 부는 게 느껴지는 바람이나 바닥의 촉감, 풀내음과 함께 은은히 느껴지는 그녀의 체향이라거나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졌다.

장자가 꿈속의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하는 호접지몽이 생각날 만큼 현실과 분간이 안 갔다.

 

“아이신 님이시군요. 복장도, 이름도 익숙한 게 없어요. 물론, 아이신 님께서도 이 세상에 대해 그리 느끼시겠지만요.”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집에서 입고 있던 복장 그대로였다.

사막 픽셀 아미 컴뱃 셔츠에 회색 츄리닝 바지, 아주 활동성이 좋은 차림새로, 그는 집에 있든 밖을 나가든 일단, 활동성 좋고 편해야 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저희가 지급해 드리는 것은 부족한 것들로 여기서 골라 주시겠어요.”

 

자신을 가야라고 소개한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가며 손을 가슴 앞에 모으더니 활짝 펼쳤다.

그러자 활짝 펼친 양 손 사이로 홀로그램들이 나타났다.

 

“굳이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요?”

“입고 계신거나 처음에 지급되는 거나, 비슷한 수준일 거예요. 음, 오히려 처음 지급되는 것보다 좋은 걸 입고 계신 만큼 갈아입으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네요.”

 

둥둥, 떠 있는 홀로그램 창에는 다양하지만 그리 질은 좋아 보이지 않는 무기들과 신발, 장갑, 가죽갑옷이나 튜닉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는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와 갈색 가죽으로 만든 짧은 부츠와 갑옷, 장갑과 검정색 벨트를 택했고 그의 앞에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놓여졌다.

 

“직접 입어야 하나요?”

 

원래 게임이란 게 자동 환복 기능이 있지 않은가, 증강현실게임에서 하던 갈아입던 느낌으로 모션들을 취해 봤지만 입어지질 않았다.

 

“네, 다른 방법이 있나요?”

 

가야는 의아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어 왔다.

안타깝게도 더 탑은 모든 장비를 손수 착용해야 하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감을 살려주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귀찮기도 했고 플레이간 이용할 수 있는 편법이 줄어드는 셈이 되기도 했다.

 

“없습니다.”

 

그는 그리 답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부츠를 신고 장갑을 끼고는 벨트를 허리에 걸쳤다.

벨트라고는 하지만 바지를 고정시켜주는 용도 보다는 단순히 병장기를 몸에 걸치기 위한 용도의 벨트인 탓에 가죽 갑옷 위에 고정시키고는 바스타드 소드를 걸쳤다.

 

“무척 익숙하신 것 같네요.”

“익숙하긴요. 잘 착용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걸요.”

 

검이 제대로 고정되었는지 툭툭, 치며 확인을 하며 답하고는 검을 뽑아 예리한 날을 뽐내는 검신을 바라봤다.

검을 몇 번 만진 적도 있고 휘둘러 본 적도 있지만 그건 그저 말 그대로에 불과한 터라 좋은 녀석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도 휘두르고 두 손으로도 휘둘러봤다. 웨이스티드 그립이라고 해서 손잡이 중간에 있는 돌기나 장식물 덕분에 한 손이든 양 손이든 안정적으로 휘두를 수 있었고, 가드는 검날 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속으로 자신의 정보를 보겠다고 생각해 보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 앞에 홀로그램 창이 나타났다.

아무리 뇌파를 다루는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생각과 연동되다니 위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정식 출시될 리도 없지 않은가.

 

이름 : 아이신

종족 : 인간

국적 :

소속 :

레벨 : 1

직업 :

명성 : 0

칭호 :

 

힘 : F, 민첩 : F, 체력 : F, 내구 : F, 마력 : F

 

상태 :

 

스킬 :

 

텅텅 빈 상태창과 스킬창을 본 그는 한숨을 이걸 언제 다 성장시키나 싶은 생각을 하며 닫겠다고 생각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곧바로 홀로그램 창이 사라졌다.

다시 한 번 더 드는 생각이지만, 이 기술은 좀 아닌 것 같았다.

기존의 증강현실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로 곧바로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잘 하셨습니다. 그 창은 본인에게만 보이는 것이니 남에게 유출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너무 그것만 보고 계시다간 넘어지실 지도 몰라요. 다음은 가방을 생각해 보시겠어요?”

 

이번에도 놀랄 건 없이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눈앞에 인벤토리 창이 나타났고 당연하게도 휑했다.

 

“이 세상에서 본래의 세상으로 가고 싶다면 메뉴라는 걸 생각해 보시겠어요? 저희들은 그 메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신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더군요.”

 

메뉴까지 기본적인 창들을 떠올리는 것들을 듣고 모두 한 번씩 행하자 그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상태창부터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재능과 직업에 따라 스텟이 오르며 스텟이 얼마나 오르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스킬의 경우 정확히 이해한 행동을 수차례 반복하거나 스승으로부터 사사받거나 스킬북을 이용해 배울 수 있으며 숙련도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고 했다.

기존 게임과 살짝 다른 시스템이긴 하지만, 크게 다른 점도 없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없이 자잘한 설명들을 모두 듣고 이해했다고 답하자, 그녀는 이제부터 본론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울퉁불퉁한 검녹색 피부에 뭉개진 코, 길게 째진 눈과, 기형적으로 위로 뾰족하게 솟아 있는 귀까지 무엇 하나 좋은 인상주기 힘든 고블린 한 마리가 나타났다.

허름한 갈색 가죽을 허리에 걸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몸을 가리는 건 없었고 도구는 손에 들린 돌도끼가 전부였다.

녀석은 갑작스럽게 이곳에 온 모양인지 주변을 경계하는 기색으로 돌도끼를 들어 올리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마물을 죽이지는 않아요. 자그마한 것부터 천천히 죽여 나가게 하거나 아니면 진짜 세계로 가신 뒤에 직접 천천히 죽여 나가도록 되어 있지요. 하지만, 아이신 님께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그저 차갑고 날카롭게만 보이던 아름다운 눈동자가 지금은 포식자가 먹이를 보는 것만 같아 전신에 소름이 돋고 경계심이 돋아났다.

아무리 그가 군인이라 한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물을 죽여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군인은 정말이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느낌이 강하기에 실전을 경험해 보는 이들은 파병을 가 본 게 아닌 이상 전무했다.

 

“왜, 그렇게 생각십니까?”

“후후, 농담이예요.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으로 생명을 죽이는 것이 있답니다. 이 훈련의 마지막은 마물을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요. 물론, 원치 않으신다면 하지 않으셔도 되고 이전 단계인 동물부터 시작하셔도 된답니다.”

“이 훈련이란 건 제가 원하면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나요?”

“원하신다면요.”

 

그는 눈을 감고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눈을 뜨고는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여인이 무어라 중얼거렸고 고블린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괴성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뭔갈 좀 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가 그리 말하며 곁눈질로 그녀를 봤지만, 그녀는 그저 옅은 미소로 답할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고블린의 키는 고작해야 1m수준으로 무기도 돌도끼 밖에 되지 않는 터라 진다는 게 이상할 수준의 차이를 지녔다.

 

그가 차분한 태도로 고블린을 노려보자 고블린이 이내 괴성을 지르며 뛰어오더니 그를 향해 휘둘렀다.

그는 서 있는 상태에서 한 발을 내딛으며 사선으로 강하게 내려 긋자 돌도끼가 고블린의 손에서 날아가고 그대로 검의 날이 녀석의 몸 절반에 가까이 파고들었다.

손끝에서부터 스멀, 스멀 올라오는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각에 그는 구역질이 올라왔으나 그걸 참아내고는 발로 녀석의 몸을 걷어차 검을 뽑아냈다.

살이 뭉개지고 갈비뼈가 박살나는 감각에 재차 몸서리 쳐졌지만, 그는 침을 뱉고 애써 태연한 척을 했지만, 속은 달랐다.

아무리 게임이라 한들 죽이는 것 마저 이렇게 선명히 느껴진다면, 죽이고 나서의 모습도 이렇게 현실적이라면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사냥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게임이라 하지만 현실과 달리 느껴지는 게 없었다.

 

“고블린으로 한 번더 해보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마물로 해보시겠어요?”

 

그녀는 마치 그가 당연히 수락하리라는 태도로 물어왔다.

그는 손끝에서부터 스멀, 스멀 올라와 전신을 잠식한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각에 칼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저기에 있는 유저들이 그를 이상한 듯 쳐다봤지만 가야는 그리 신경 쓰는 듯 보이지 않았다.

 

“후, 다음은 뭐 오크인가요.”

 

너무도 쉽게 예상 되는 터라 그리 물었더니, 당연하게도 맞다는 말과 함께 고블린이 소환되었던 자리에 오크가 소환되었다.

 

“준비 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당연히 그가 오크와 맞상대할 거라는 것 같은 태도였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오크를 바라봤다.

흔히 묘사하길 단신에 근육으로 가득 들어찬 몸에 돼지 머리를 한 걸로 묘사되는데 그의 눈 앞에 있는 오크는 검녹색 피부에 돼지와 사람의 중간 즈음 되어 보이는 역겹고 혐오스러운 대가리와 단신 까지는 일치했지만, 근육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오히려 통통해 보이는 녀석이 이가 잔뜩 빠지고 녹까지 슨 롱소드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준비 됐습니다.”

 

고블린은 너무도 쉽게 죽어 나자빠졌지만, 그래도 이번 상대는 나름대로 검이라도 들고 있었다.

근육이 그리 없어 보이긴 하지만 검에 찔리면 죽는 건 매한가지기도 했고, 죽일 때의 감촉처럼 타격을 받을 때의 감각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다.

 

이번에는 좀 전의 고블린과 달리 갑자기 눈이 시뻘게진다거나 하는 변화는 없지만,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오크가 뛰어들어왔다.

속도 자체는 그리 빠르진 않지만, 150cm정도 되는 키에 칼까지 있다 보니 위협감이 들었다.

그래도 힘이라는 것에선 질 것 같지 않은 느낌에 그는 가드와 가까운 부분인 포르테로 녀석의 검을 쳐냈다.

어설프게 아는 지식이지만, 칼을 대충 반으로 나누어 손잡이 쪽은 포르테, 칼끝 쪽은 포이블로 나누는데, 포르테 쪽은 공격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막기에 좋고, 포이블은 베는 것에 효과적이지만, 막기에 부족한 면이 있어 나름대로 휘둘러 봤더니 우연이라고 할지, 재능이라고 할지 포르테 부분으로 쳐낼 수 있었다.

오크의 양손이 들리며 상체가 훤히 드러나자 오크의 검을 튕겨내며 들어 올려진 검을 그대로 내려 오크의 오른쪽 어깨부터 좌측 복부까지 길게 베어버렸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양 괴성을 지르며 검을 놓치더니 갈라진 상체에서 장기를 흘리면서까지 그에게 몸을 부딪혔다.

장기가 쏟아지는 상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힘에 그가 나뒹굴며 검을 놓쳤고 옷이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구르며 일어서자 어느 사이엔가 녀석이 그가 있었던 곳에 머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어디라도 다친 모양인지 그는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녀석의 대가리를 걷어찼다.

녀석이 대자로 바닥에 쓰러지자 뱃가죽이 너덜거리며 신체 내부를 훤히 보여줬다.

그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고는 발을 들어 올리더니 명치 아래 부분을 왼발로 차버리자 너덜거리는 뱃가죽 속으로 들어간 발에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가야 씨라고 했죠.”

“네.”

“통각에 한계가 있나요?”

 

넘어질 때 느꼈던, 그 감각은 현실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의 육체에서 아드레날린이라도 분비되어 영향이라도 미친 모양인지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녀석을 처치하고 긴장감이 사라지자 고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통각에 한계가 있다니요?”

“아, 그렇죠.”

 

이 npc는 그들이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방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게임속 npc가 아닌 진짜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으니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처음으로 죽이시는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죽이시던걸요. 망설임도 없이.”

“그거야 뭐,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처음부터 잘 죽이는 사람, 죽이질 못 하는 사람, 죽이지 못 했지만 죽일 수 있게 된 사람. 아이신 님께선 첫 번째 부류이신 것 같군요.”

“첫 번째 부류라뇨.”

 

그는 약간 인상 쓴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고, 그녀는 죄송하다며 가늘고 고운 손을 들어 깊게 파여진 가슴을 가리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래도 이 세계에서 지내시는 동안 좋은 일이지 않겠어요?”

 

그녀는 옅게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손짓으로 두 시체와 핏자국, 장기들을 증발시켜버렸다.

 

“물론, 원래 세계에서는 마냥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다음 단계도 있습니까.”

“예, 물론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쉽게 죽이실 줄은 몰랐네요. 아무리 전사급이 아닌 일반 오크라고는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힘이 장사거든요. 게다가 검을 다루는 것도 거의 처음으로 보이시네요. 보이거든요. 그런 게.”

 

그저 통통한 체형에 작은 키로 힘이 강력할 것 같지 않지만, 오크의 근육은 인간의 근육에 비해 더 적은 양으로도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다음은 프로쿰입니다.”

 

두 시체가 사라진 자리에 근육질의 인간이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근육질의 인간의 피부를 죄 벗겨놓은 듯 한 몸에 얼굴에는 칙칙한 검붉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언뜻 언뜻 드러난 그 얼굴도 몸 만큼이나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프로쿰은 힘 만을 추구한 존재가 영락했을 때의 모습 중 하나예요. 당연히 지금으로선 무리죠. 다만, 약화시킨 상태이니 이기실 수도 있어요.”

“글쎄요. 저는 모험을 그리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여기까지만 하죠.”

“그러시다면 말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보상이 있다면요?”

“그렇다면 해 볼 만 하지요.”

 

감각이 이리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만큼, 두려움도 들었다.

정말 저 몽둥이에 대가리를 맞고 쇼크사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쓸모 없는 생각이 들 만큼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자세를 다 잡았다.

고블린과 오크까지야 힘으로 이겼지만, 눈앞의 상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힘을 약화 시킨 상태라고는 하지만, 보디빌더 뺨치는 근육이 피부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 프로쿰이라는 녀석에게 한 대라도 맞으면 그대로 게임 끝일 것만 같았다.

 

“그럼 잘 싸워주세요.”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달려오는 프로쿰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그도 달려가며 위에서 아래로 베었다.

손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역겨운 감각 속에서도 프로쿰을 응시하자, 녀석의 좌측 어깨부터 오른쪽 복부까지 길게 베이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그렇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달려와 그의 몸에 주먹을 날렸다.

복부에 이른 주먹에 숨이 턱턱, 막혀오며 허공을 비상했다.

귀에서는 삐, 하는 소리가 울려 들리는 게 없었고 시야가 흐릿한 것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일단 본능적으로 굴렀다.

 

곧이어 그가 있었던 자리에서 강력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꽂힌 주먹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그는 욕지기를 내뱉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이 상태로는 약점같은 목이나 머리를 벨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제대로 힘을 내지도 못 하니 상대의 힘이나 역이용하자는 생각이었고 맞아들었다.

명치를 파고든 검이 탄력적인 무언가를 뚫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는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한 번 더 얼굴을 얻어 맞고 발에 걷어차여 허공을 다시 한 번 더 날아야만 했다.

쪽팔리게도 눈물 콧물 죄 질질 흘러나올 만큼 고통스럽고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명치라도 걷어차인 모양인지 심장이 마치 멎은 것만 같았고, 입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흘러 나와 신음조차 흘리질 못 했다.

애써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자 녀석이 가슴에 꽂힌 검에는 데미지라도 입은 모양인지 비틀,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의 머리칼을 잡고 들어올렸다.

머리칼이 죄 뜯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추가되자 그는 최후의 발악으로 검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찍었다.

체내에 박힌 검이 크게 뒤틀리자 녀석이 크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손에서 힘을 풀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채 한동안,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릴 뿐 일어나지도,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로 그가 시발, 시발 거리며 일어나며 그녀를 쏘아봤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기긴 했으나,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진심으로 쇼크사하는 줄 알았다.

 

“축하드려요. 프로쿰을 잡으셨어요. 비록 약화된 개체이긴 하지만 결코 쉬운 녀석이 아니랍니다. 느껴보셨겠지만, 어지간한 부상은 무시하고 공격하는 터프함 때문이죠. 팔이 잘려도 남은 팔로 공격하고 다리가 잘리면 남은 다리로 점프해 공격하고 팔다리 모두 잘려 나가면 입으로라도 물어뜯는, 오직 전투 하나 밖에 모르는 존재랍니다.”

“그래서 그 보상이란 건요?”

 

그는 애써 튀어나오려는 욕을 참고 대답했고 그녀의 손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부채가 펼쳐진 채 입가를 가렸다.

하얀 바탕에 묵으로 그려진 장미라니 뭔가 미묘한 조합들이었지만, 고급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부채였다.

 

“열심히 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 있어야겠지요.”

 

그녀가 입가를 가리던 부채를 한번 휘두르자 그의 앞에 웬 향낭 하나가 둥둥 떠 있는 채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뒤로 돌았고, 한복의 등 부분이 죄 파여 있어 그녀의 매끈하고 새하얀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력적인 게 어느 정도 드러나도 중요한 건 드러나지 않는 게 취향 이신가봐요.”

 

짧은 치마를 들어 올리자, 검은색 스타킹과 가터벨트에 감싸인 터질 것만 같은 허벅지가 아찔하게 드러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감상할 새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향낭을 받아들었다.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그녀는 다시 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저는 지금 당신의 취향 그 자체이지 않나요? 뭐, 그 색목인 년들에 대한 취향도 있으시겠지만, 우리 동방 여인에 대한 당신의 취향을 그대로 형상화했거든요.”

“제 취향을요?”

 

아무리 요즘이 빅 데이터니 뭐니 하는 세상이지만, 일개 게임사가 처음 접속해 보는 게이머의 성적 취향을 알 리가 만무했다.

 

“이게 게임이라고 생각 하시는 거죠.

 

그녀는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한걸음씩 다가오더니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서고는 접은 부채를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를 npc라고 생각하고요.”

 

그녀는 그의 한쪽 손을 잡아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쓰다듬게 만들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당신들은 이 세계의 신에게 속았어요. 이 세계의 신은 장난꾸러기거든요. 당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속아 이 세계에 들어오기도 했고요.”

 

게임사 홈페이지에 없던 설명으로 그는, 이 npc가 오류를 일으키나 싶었지만, 취향 저격하는 눈앞의 여인이나 정말 인간 같은 행동거지, 감각들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 창이라고 하던가요. 그 중 메뉴창에 들어가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눌러 보실래요?”

 

그녀의 말에 따라 메뉴창을 띄어 로그아웃을 눌렀지만 아무런 현상도 없이 여전히 게임 속이었고, 그녀가 계속해서 보였다.

 

“장난꾸러기 신은 하나의 탑을 만들었어요. 그 끝은 본인만 알고 탑 끝에 있는 존재조차 자신이 끝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높고 비밀스러운 탑을요. 당신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면 그 탑의 정상에 올라야만 해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죠. 올라갈 수만 있다면요.”

 

그녀는 그가 해낼 수 없으리라는 가정을 깔고 말했다.

수백,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 수많은 지성체, 마물들이 미치광이 신에게 속아 이 세계에 납치되었지만 그 끝에 거의 도착한 적이 있는 ‘이’ 하나 나타난 적이 없었다.

정말 탑을 정복할 것만 같았던, 영웅과 악당들도 모조리 탑에서 나가떨어졌다.

 

“뭐, 믿기 어려우실 거예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이들이 그랬거든요.”

 

그녀의 말마따나 믿기 어려웠으나, 지금까지도 느끼고 있는 이 감각은 이것이 한낱 게임 따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게임이라 한들 현실에 이 정도 수준의 기술력이 있었던가.

 

“그럼 이제부터 세상에 잘 적응해 나가시길 바랄게요.”

 

그녀가 접었던 부채를 활짝 펼치자, 주변의 광경이 바뀌었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고 푸르렀던 초원은 어디가고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나 볼 법한, 두터운 나무로 뼈대 삼아 짓는 하프 팀버 양식의 건물들이 널린 광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뒤돌아서자, 자그마한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벤치에 다정하게 앉은 채 대화를 나눴다.

“또 소환 됐어” 등 그를 비롯한 지구인들을 일컫는 말들이 들리는 와중에 그는 애써 무시하며 인벤토리를 떠올렸다.

인벤토리에는 금화 5개와 하얀 바탕에 검은색 실로 장미를 수 놓은 향낭, 그리고 그녀가 쓰고 있던 부채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가야의 향낭.

 

최고급 비단의 재료 중 하나인 월잠으로부터 뽑아낸 실로 만든 주머니에 곱게 간 흑장미를 넣어 만들었으며 아주 미약한 힘을 지니고 있는 꽃의 정령이 들어 있어 향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야의 부채

 

세계수 근처에서 자라나는 축복받은 오죽과 세계수로 만든 종이로 만들고 마법적 처리를 가해 내구성이 강철보다 뛰어나며 108절에 이르는 마디를 지니고 있다.

 

딱히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판다면 무척이나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향낭만 해도 느껴지는 촉감이 지금껏 만져 보았던 그 어떤 비단보다도 부드럽고 고급스러웠으며 부채의 경우 108절에 이르는 마디라니, 현대에 이르러선 마디가 가격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 이전만 해도 마디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신분과 가격이 결정되었다고 들어 보았으나 108절에 이르는 마디는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50절 정도.

 

그나저나 강철이상으로 강한 나무와 종이라니, 역시 세계가 달라서 그런 걸까, 그는 손에 착착 감기는 그립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 뿐만 아니라, 은은히 풍겨오는 나무의 내음도 괜찮게 느껴졌다.

 

그는 부채와 향낭을 인벤토리에 다시 넣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가야가 사용한 언어와 지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 그거 처음 들어보는 발음이며 간판에 쓰여진 글자 역시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것 마냥 이해가 갔다.

이것도 그 장난꾸러기 신의 짓일까.

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옅게 흔들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를 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아는 것도 없고 날도 이미 저물어서 슬슬 사람들의 발걸음들이 뜸해지는 시기이기도 해 우선 숙소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금화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금이니 당분간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까, 싶지만 그런 금액을 초장부터 줄 리도 없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와 같이 소환된 이들로 보이는 이들은 대개 편한 반바지에 상의는 가죽갑옷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이 세계의 장난꾸러기 신께서 그리 친절하지 않으신 것을.

 

‘착잡한데.’

 

아는 사람, 아는 건물, 아는 지명 등 그 무엇도 아는 것 없는 곳으로 황인, 백인, 흑인 모두 섞여 돌아다니고 있었고 복장은 각양각색으로 현대의 문명을 떠올리게 하듯 정장 차림을 한 이들도 있는 반면 전신을 가죽갑옷으로 모두 보호한 이나 철판으로 된 갑옷을 입은 이,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호객하는 여성이나 자신을 잘 꾸민 잘생긴 남성이 호객하는 모습이나 온갖 모습들이 뒤섞인 것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달이 머문 곳.’이라는 여관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는 위, 아래로 다 뚫린 채 상반신만을 막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내부는 조용히 술을 마시는 이들이나 침을 격하게 튀기며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이 한데 뒤섞인 채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방 있습니까?”

 

데스크에서 맥주잔을 손님에게 건네고 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검정색 원피스 위에 입은 갈색 가죽으로 만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인 차림새를 한 탓인지, 원래 몸매가 좋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법 몸매가 좋아 보이는 게 눈뇨기로 나쁘지 않았다.

 

“1인실이요?”

“네.”

“1인실이야 늘 자리가 두세 자리 정도는 남아 있죠. 새로운 소환잔가 봐요?”

“예, 맞습니다.”

“새로운 소환자들에겐 안 좋은 일이지만 우리에겐 새로운 손님이 늘어나겠군요. 서비스로 목욕비는 받지 않을게요. 아, 1인실은 하루에 은화 5개예요. 한 끼 식사는 은화 1개고요.”

“금화 한 개면 은화 몇 개 정도죠?”

“금화요? 좀 봐야겠는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금화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자 그녀가 허리를 숙여 금화로 가까이 다가와, 가뜩이나 코르셋으로 강조되고 깊게 파인 원피스 사이로 노출된 풍만한 가슴이 더욱더 좋은 각도에서 훌륭히 보여졌다.

 

“호오, 엘프족의 금화네요?”

 

크기는 검지 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정도에 금화 한쪽 면에는 나무가, 한쪽 면에는 청순하고 고결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의 외모가 실물을 보는 것처럼 생생히 음각되어 있었다.

 

“보통, 오크들의 금화가 가장 가치가 떨어져요. 오크들의 건, 불순물이 이래저래 많이 섞여 있거든요. 그래서 종종 은화 두세 개 정도 밖에 안 되는 값어치인 경우도 있죠. 하지만, 엘프들의 건 위층에서는 어떻게 취급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1층에서는 최고의 것으로 치고 있어서, 보통 은화 서른다섯 개 정도의 값어치를 하고 있죠.”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목욕물을 공짜로 줄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한 번 말한 걸 무를 수도 없고.”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장난스레 웃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럼, 일단 하루 대실이랑 오늘 저녁 식사 값을 치루겠습니다”

“그럼. 은화가 29개네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가죽 코르셋에 걸린 갈색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숫자를 세어보고는 손목에 걸린 열쇠고리에서 열쇠 하나를 빼 건넸다.

 

“방은 3층 가장 끝에서 좌측 방 쓰시면 되고요. 목욕물은 바로 올려드릴까요?.”

“식사하고 올려주시겠습니까?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그때 올려드릴게요.”

 

이리저리 사람들이 차 있긴 했지만 빈 자리가 아예 없지는 안 터라 구석에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벽과 천장 중간, 중간에 걸린 촛대에 꽂힌 초에서 빛나는 불 만이 유일한 빛이기에 여관 내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잠시동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던 그에게 주근깨가 난, 붉은 머리의 소녀가 다가와 책상 위로 음식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음식들이라곤 하지만, 고기와 이를 모를 버섯과 야채로 만든 듯 한, 스튜와 하얀빵 두 조각, 그리고 심심해 보이는 샐러드가 전부였지만, 반찬투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터라 그는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스튜는 간이 적당히 맞기는 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고 샐러드는 소금을 약간 친 것이 전부여서 아까운 느낌이 들었지만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사가 끝나고는 목욕은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답하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열쇠는 무척 간단한 형태로 쉬이 딸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없는 것 보단 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탁자 위에 놓고 가죽 갑옷을 스탠드형 옷걸이에 걸고는 벨트와 함께 허리에 다시 차고, 문을 나섰다.

이 가죽갑옷 이란 게 가죽을 경화시킨 것이다 보니 그렇게 많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무겁기도 하고 아예 불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홀가분해 진 몸으로 그제야 내부를 다시 한 번 더 훑어봤다.

살짝 탁한 빛깔이 돌긴 하지만 나름 세탁을 한 것 같은 침대보와 침대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긴 하지만,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리라.

그는 한숨을 토해내며 그대로 여관을 나섰다.

일단, 너무도 답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쉬고만 싶지만, 그렇게 쉬려고 하자 웬지 모르게 그건 그것대로 불안했다.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물어, 물어서 도착한 곳은 대장간으로 모루와 망치만 그려져 있는 심플한 간판이 달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