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낙스 1부
'이 작품을 만들 수만 있다면 회사가 망해도 상관없다'
가이낙스의 신조라고 한다. 동인 시절부터 그저 하고싶은 일에 거침없이 몰두해왔던 소위
'오늘만 사는' 마인드는 프로에 입문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립우주군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작품 활동을 계속했지만 매번 돈벌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결과로 수렴했다.
작품을 만들수록 빚은 쌓여만 가고 계획에도 없던 게임 개발로 충당해가는 암울한 상황,
그로 인한 내부 분열, 돈벌이라는 것은 결국 하고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외면할 수 없는, 해서도 안 되는 요소임에 틀림없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준 '만루 홈런'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처음으로 돈다운 돈을 벌어보고 지긋지긋했던 빚더미에서 벗어나고
업계 안팎으로 명성, 신용, 인지도가 수직 상승했다.
하지만 사회현상으로 번진 광적인 열풍과 엄청난 수익은 그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놀란 나머지 제대로 경영자금으로 운용하려 하기보단
빨리 숨겨야한다는 마음이 앞섰고 결국 탈루와 탈세라는 부정적인 방법까지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회계의 회짜도 모르는 그들의 은닉 수법이라는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졸부 가이낙스'의 소문을 익히 들었던 세무 당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각은 얼마 안 가 들통나고 말았다.
가이낙스는 98~99년 탈세 사건으로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다
게임소프트를 개발하는 명목으로 거래처에 업무를 허위로 발주하여 에반게리온 이후 2년 간
약 15억 6천만 엔의 소득을 숨기고 법인세 5억 8천만 엔을 탈세한 정황이 포착되어
사장 사와무라 타케시가 구속되었다. 어수선해진 회사는 직원들이 하나 둘 떠날 채비를 하며
공중분해의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그리고 늘상 그래왔듯 구원에 나선 것은 안노 히데아키였다.
그는 에반게리온 이후 실사영화 쪽에 발을 들이며 '현실로 나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몸소
실천하던 중이었으나 무너져가는 회사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는지 급히 기획 하나를 내놓았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이었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1998)
츠다 마사미 원작의 순정만화로 본성을 숨기고 우등생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두 남녀 고등학생의 청춘드라마이자 사춘기의 예민한 심리를 섬세하게 그리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이에 안노 역시 자신이 에반게리온에서 선보였던 효과적인
심리 묘사 기법들과 더욱 실험적인 연출을 더하며 원작의 감성을 돋보이게 하는데 일조했다.
다양한 실험적 연출이 돋보였다
안노의 도움으로 분해될 뻔한 회사의 위기는 어느정도 수습되어갔다. 탈세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와무라 타케시를 대신해 야마가 히로유키가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가이낙스의 경영방침은 크게 바뀌었다. 기존의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탈피하여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양한 작품을 맡으며 신용 회복에 부던히 노력했다
또 한편으로는 세대교체였다. 안노가 일선에서 물러나있고 기존 멤버들이 경영에 좀 더
신경써야 하는 상황에서 제작 현장을 실력 있는 후배들에게 과감히 양보하기 시작했다.
'프리크리'는 그 신호탄이었다.
2000~2001년 6권의 OVA로 발매된 프리크리는 안노 히데아키의 오른팔이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부감독을 맡았던 츠루마키 카즈야의 감독 데뷔작이다. 또한 이마이시 히로유키, 오오츠카 마사히코 등
훗날 트리거의 주역이 되는 인물들도 제작 전면에 나섰고 '소녀혁명 우테나'로 유명한 에노키도 요지가
각본으로 참여했다. 초등학생 주인공 소년이 수수께끼의 소녀 하루코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로 뛰어난 작화 퀄리티와 정신없이 펼쳐지는 스토리 전개로 일본보다 미국에서 더욱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가려져있던 차세대 주자들은 기다려왔다는 듯이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었다. 의문투성이의 설정들과 불친절한 스토리 전개, 그동안의 실험적
연출을 종합시킨 시종일관 밀도 높은 구성,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듯 난해한 메시지,
반항적이고 패기 넘치는 작품의 내용은
21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프리크리로 '연출의 가이낙스' 라는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공식 AMV 중 하나인 Come Down
록밴드 the pillows의 음악은 작품의 흥을 돋구는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2004년 공개한 '톱을 노려라 2!'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프리크리 제작이 끝났을 무렵
반다이에서 톱을 노려라의 후속편 제작 의뢰가 들어왔고 츠루마키가 감독을 자청했다.
전작의 감독 안노는 4화의 그림 콘티 정도만 참여하며 개입을 최소화했으며 내용 면에서도
전작과 크게 다른 분위기로 세대교체의 의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톱을 노려라 2! (2004)
가이낙스 설립 2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다
전작과 크게 다른 분위기로 초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우주 파일럿을 꿈꾸는 안드로이드 소녀 노노와 '톱레스'라고 하는 초능력을 지닌 선택받은 소녀
라르크의 이야기로 3화까지는 전작과의 접점이 거의 보이지 않아 세계관만 같은 외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많았지만 안노가 참여한 4화에서 분위기를 뒤흔드는 반전이 나오면서 엄연한 정통 후속작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전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치밀하게 설계된 것으로 스토리의 전반적인 윤곽을
잡는 데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허를 찌르는 반전이 등장하는 톱을 노려라 2! 4화
'톱레스'라는 초능력은 '정보를 재구축하는 능력'이다. 츠루마키 감독에 따르면 '망상하는 힘'
즉, 오타쿠에 대한 은유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가며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혹은 그렇게 강요당하는 능력,
어른이 되면 오타쿠를 졸업해야 하는 것인가? 과거 톱을 노려라!에 열광했던
오타쿠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노력과 근성이다!
노노의 말버릇인 노력과 근성, 그것은 전작의 주인공 노리코가 강조했던 것이기도 하다.
비록 세월이 흘러 '노노리리'라는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었지만 본질적인 의지는 변치 않았던 것이다.
『21세기의 오타쿠와 한때 오타쿠였던 어른들에게…』
작품의 캐치 프레이즈대로 노노라는 인물은 십수년 전 톱을 노려라를 제작했던 또한 열광했던
오타쿠들의 열정과 의지를 긍정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와 이어주는 메신저였던 셈이다.
"노노리리가 빛낸 특이점은 노노가 가져가겠습니다. 대신,
언니에게는 노노의 특이점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대 들어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해오면서 가이낙스는 서서히 체력을 회복해나갔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한편에서는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줄곧 표류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2006년, 마침내 감독을 자청하는 이가 등장했다. 이마이시 히로유키였다.
10년 전 에반게리온에서
동화를 그리는 말단 스태프였던 그가 처음으로 감독 자리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요시나리 요우, 니시고리 아츠시 등 역시 차세대 인재들이
제작 전면에 나섰고 '겟타로보 사가'의 편집자로 유명한 나카시마 카즈키가 각본으로 참여했다.
스폰서로는 카도카와, 애니플렉스, 코나미가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가이낙스 최초의 단독 제작 TV 애니메이션이다
각본 나카시마 카즈키 (좌)
캐치 프레이즈는 '21세기 로봇 애니메이션의 진짜 주인공'이었다.
그것은 '열혈'로 대표되는 정통 로봇 애니메이션을 표방한 것이기도 했다.
한때 주류였지만 세월이 흘러 여기저기 패러디 소재로나 쓰이던 열혈물, 그러나
제대로 만들면 가벼운 웃음거리가 아닌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신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스스로가 로봇 애니의 광팬이기도 한 이마이시 감독은 자신이 봐온 30년간의 작품들을
그렌라간에 집대성하고자 했다. 전체 27화의 분량을 입지, 풍운, 노도, 회천의 4부작으로
구성한 것과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그리고 우주까지,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끝에 가서는 은하를 던지고 논다
'천원(天元)'은 만물의 근원, 또한 바둑판의 정중앙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굴레, 억압을 정면돌파하여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이며
그 수단이 '드릴'이라면 목적은 '진화'라는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면돌파는 대성공이었다. 3만장 대의 BD/DVD 판매량으로
에반게리온 이후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고
후에 개봉한 극장판도 좋은 성과를 거두며
철지난 구닥다리 신세였던 정통 열혈물을
재조명시키는 데 성공함은 물론
가이낙스 세대교체의 완성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시금 분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작은 안노 히데아키였다. 10년 가까이 제작일선에서 물러나있던 그가 돌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을 다시 만들겠다며 새로운 스튜디오를 차린 것이다.
여기에 츠루마키 카즈야, 마사유키 등의 에반게리온 핵심 제작진이 합류하면서
가이낙스를 지탱해온 한 축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안노는 2006년 스튜디오 '카라'를 설립하며 가이낙스를 완전히 떠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중심으로 한 그렌라간 팀 역시
2010년 '팬티&스타킹 with 가터벨트' 제작을 끝으로 보다 자유로운 환경을 찾아 떠났다.
세대교체의 완성으로 평가받던 그들의 이탈은 에반게리온 팀 못지 않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렌라간 팀은 2011년 트리거를 설립하며 가이낙스에서 독립했다
모두 처참히 망했다
현장의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가이낙스의 근황을 살펴보자면
2015년 '방과후의 플레이아데스'를 끝으로 신작은커녕 제작 협력으로조차 이름을 찾기 힘들어졌다
업계에서는 '현실감각이 없다'며 가이낙스에 작품을 의뢰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선 야마가는 여전히 푸른 우르를 포기하지 않았다.
93년, 97년 두 차례에 걸쳐 좌절된 프로젝트를 2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다시 꺼내들었다.
2018년 개봉 예정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지진 피해 회복을 돕겠다는 명분으로 후쿠시마로 진출한 것 또한 황당한 행보였다
그나마도 시작에 불과한 것으로 2년 사이 요나고, 교토, 니가타, 효고 등 다분히
지방보조금을 노린 듯한 영혼 없는 진출은 암울한 가이낙스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명분은 하나같이 지역발전을 위해 공헌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최근에는 안노의 회사 카라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빌려간 돈 1억 엔과
에반게리온의 저작권 수익금을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사이마저 완전히
틀어졌는지 과거 몇 번이고 회사를 위기에서 구했던 안노마저 차갑게 돌아선 것은
단순한 금전적 위기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가이낙스가 위기라는 것은
이제와서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동안의
숱한 위기를 극복해온 배경엔
그만한 인재들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과거의 위기들과 지금의 위기는
그 무게가 달리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해결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제작 회사라면 작품을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다.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빚을 갚기 위해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쨌든 다시 작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가이낙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른 제작사에 대한 이야기도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평안한 한 주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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